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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8월 26일 _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8-08-26 조회수 : 310

책을 좋아하는 저를 향해 어떤 분께서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저는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을 잘 이해하기가 힘들어요. 세상에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책을 그렇게 많이 읽을 수가 있습니까?”

사실 저 역시 학창시절에 이와 비슷한 마음을 갖기도 했습니다. 책을 읽는 것보다는 다른 건설적인 일들을 하는 것이 더 이롭다는 생각을 했었거든요. 그러나 지금 현재에는 누구보다도 많은 책을 읽습니다. 책을 읽는 무슨 특별한 은사를 받은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남들보다도 일찍 노안이 와서 돋보기를 쓰고 책을 보는 불편함까지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도 책 읽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책을 통해 얻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을 분명히 알기 때문입니다. 내 안의 지적 호기심을 채우는 것은 물론이고, 단어들과 문장들을 통해 제 가슴 속에 커다란 울림을 간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체험을 하지 못한 사람이 과연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을 이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아마 이상한 사람 취급을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시는 분들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과연 열심히 신앙생활 하는 사람이 이상한 것일까요? 신앙생활을 통해 주님께서 어떤 분인지를 알게 되었고, 이 주님 곁을 결코 떠날 수 없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열심히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례를 받았지만 성당에 잘 나가지 않는다면 신앙생활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일이 잘 풀릴 때에는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지만, 고통과 시련이 있을 때에는 성당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게 되지요.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

이 말은 누가 한 것이었을까요? 예수님을 반대했던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한 말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예수님을 따르며 예수님과 함께 했었던 제자의 말이었습니다. 제자들도 이럴진대 다른 사람은 어떠했겠습니까? 바로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이 전에 있던 곳으로 올라가는 것에 대해 말씀하시지요. 이 말씀은 하느님의 아들과 사람의 아들이 위격의 일치에 따라 한 분 그리스도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요한 6,67)는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십니다. 이에 베드로가 말하지요.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요한 6,68) 마치 제1독서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수아를 쫓아서 “우리도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여호 24,18)라는 고백했던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베드로가 고백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주님을 알려고 노력했고, 주님의 뜻에 맞추는 삶을 살았기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고백은 주님과 단순히 함께 한다고 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즉, 단순히 세례를 받은 신앙인이라고 해서 주님을 따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단순히 일주일 동안 주일 미사 한 번 봉헌한 것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다 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멈추지 않는 기도와 묵상을 통해 주님과 함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알게 되고, 주님을 절대로 떠나지 않는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진리는 듣기 거북한 것이었으며, 이는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늘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 그분을 따르고자 하는 자는 주님의 이 말씀이 결코 거북하지 않고 오히려 이 세상을 살아가는 커다란 힘이 됩니다. 

주님께서는 지금을 사는 우리를 향해서도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이 질문에 어떤 답을 하시겠습니까? 주님을 알면 알수록, 주님의 뜻을 따르면 따를수록 주님 곁을 절대로 떠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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