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들과의 모임에서 한 신부가 잘난체하는 신자 때문에 고민이라는 말을 합니다. 너무나 자주 기부하는 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교회 안에서 자신이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는지도 사람들에게 자주 말합니다. 그리고 신부에게 본당 사목을 이렇게 하는 것이 어떻겠냐는 식으로 자주 관여한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러려니 했지만 이렇게 계속 듣다보니 이 신자만 봐도 괜히 신경질이 나고 화가 난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잘난체하는 신자를 어떻게 하면 좋겠냐면서 조언을 구했습니다. 다른 신부들은 대부분 “그냥 무시해.”라는 말을 했는데, 한 선배 신부님께서 의외의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신자는 잘난체하는 것이 아니라 잘난 거야.”
맞습니다. 이렇게 인정하면 그만인 것입니다. 잘난체한다고, 밉다고, 화난다고 하면 결국은 자기 손해일 뿐이지요. 잘난체한다면 그냥 ‘잘난 것’으로 인정해준다면 비로소 해결의 실마리가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부정적인 감정이 계속 일어나면서 관계의 회복도 가져올 수가 없습니다.
사람들과 사이의 소통이 어렵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내 자신이 가지고 있는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워서 과연 소통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하라’는 주님의 기준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사람만이 마음이 열려서 진정한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바로 주님을 통해서만 관계의 회복이 이루어질 수 있으며 모두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힘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치유해주십니다.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에파타!”라고 말씀하셨지요(마르 7,33-34 참조).
사실 예수님께서는 자주 치유의 기적을 행하셨지만, 오늘의 방법은 조금 다릅니다. 당신의 말씀 한 마디에 치유가 된 적도 있었고, 어떤 사람은 예수님의 옷깃에 손을 대면서 치유의 은총을 얻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보여주시는 기적은 굳이 그렇게 하실 필요가 있을까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복잡한 방법을 쓰십니다. 왜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셨을까요?
귀먹고 말 더듬는 이는 사람들과의 소통이 전혀 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소통이 되려면 들려야 하고, 말을 제대로 할 수가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단순히 이 한 사람의 치유만을 위해서 하신 행동이 아닐 것입니다. 실제로 주님께서 하신 모든 치유의 기적은 다 그 뜻이 있었지요. 하느님의 사랑을 보여주기 위해, 믿음의 중요성을 깨닫도록 주님께서는 놀라운 은총을 우리에게 전해주셨습니다.
오늘의 기적 역시 커다란 가르침을 주십니다. 즉, 주님을 통해서만 귀가 열리고 혀가 풀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제1독서에 나오듯이, 구원의 하느님이 오실 때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이사 35,5)는 말씀이 실현되는 순간이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씀하십니다.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야고 2,5)
우리 모두가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가 되기 위해서는 주님께서 열어주신 귀, 주님께서 풀어주신 혀를 통해 세상 안에서 주님의 말씀을 듣고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우다 보면, 귀를 막고 있어서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혀가 굳어져서 세상에 주님의 말씀을 전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우리를 향해 “에파타”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간절한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진정으로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이제는 우리의 몸으로 따를 수 있어야 합니다. 더 이상 주님께 슬픔을 드리는 모습이 아니라, 주님께 커다란 기쁨을 드리는 모습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때 비로소 하느님 나라의 진정한 상속자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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