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주보

수원주보

Home

게시판 > 보기

오늘의 묵상

9월 19일 _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8-09-19 조회수 : 304

신문의 1면 헤드라인에 이런 글씨가 쓰여 있습니다. 

“대한민국 숙적 일본에 대패 당하다!”

이 기사는 과연 좋은 뉴스일까요? 아니면 나쁜 뉴스일까요? 아마 대부분 나쁜 뉴스라고 생각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반드시 나쁜 뉴스일까요? 만약 이 기사를 일본 사람이 본다면 어떠했을까요? 아마 좋은 뉴스라고 하면서 기뻐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우리나라 사람에게는 나쁜 뉴스, 일본 사람에게는 좋은 뉴스가 되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무조건 나쁜 뉴스라고도, 또 무조건 좋은 뉴스라고도 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내게 다가오는 모든 일들이 그런 것이 아닐까요? 사람들은 자신에게 나쁜 일이 다가왔다면서 화를 내고 짜증을 냅니다. 그러나 이 일이 누군가에는 좋은 일이 될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요?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어디에 의미를 두느냐에 따라 기쁜 소식도 되고, 나쁜 소식도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주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가 아닐까요? 주님께 의미를 두고 있는 사람은 고통과 시련이 찾아와도 그 안에서 주님의 손길을 찾으면서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주님께 의미를 두고 있지 못하는 사람은 어떨까요? 주님의 말씀은 기쁜 소식이 되지 않습니다. 커다란 짐으로만 여겨지고 세상 삶에 대해 끊임없이 불평불만을 퍼 붓게 됩니다.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할지가 분명해집니다. 지금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 다른 삶은 내 자신이 먼저 다르게 행동해야지만 가능합니다. 똑같이 생각하고 똑같이 행동하면서도 다른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은 지나친 착각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지금까지는 다른 주님께 의미를 두는 변화를 통해서만 우리 삶이 행복의 삶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장터에서 노는 아이들에 대한 비유 말씀을 하십니다. 피리를 불어 줄 때는 춤추며 놀아야 하고, 곡을 할 때에는 함께 슬퍼하며 울어야 합니다. 당연합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오셨음에도 기뻐하지 않고, 예수님 흠집 내기에만 여념이 없었던 것이지요. 지금 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 의미를 두고 있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 의미를 두는 삶을 살지 못한다면 어렵고 힘든 이 세상을 기쁘게 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웃어야 할 때 웃지 못하고, 울어야 할 때 웃지 못하는데 어떻게 올바로 살 수가 있겠습니까? 주님께 의미를 두는 삶은 바로 지금 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올바르게 할 수 있도록 해줍니다. 그래서 이런 마음을 가지고 지금 이 순간을 행복의 순간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매일 행복하지는 않지만, 주님이 계시니 행복한 일은 매일 있어.”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