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한 마디로 사람의 마음을 죽이는 일은 어렵지 않은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인정받고 싶어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무시하면서 반대되는 말만 하면 됩니다. 상처 받은 사람을 향해서는 “그깟 상처가 뭐 대수냐?”면서 비아냥거리면 됩니다. 자존감이 낮은 사람에게는 낮은 자존감으로 작아진 모습을 지적하면서 “네 인생은 항상 그 모양이야.”라고 조소 섞인 말을 하면 될 것입니다. 죽고 싶은 사람에게는 “너는 절대 죽을 수 없어.”라면서 마음을 더욱 더 망치는 말을 하면 됩니다.
세치의 혀로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죽일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세치의 혀로 사람의 마음을 살릴 수도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즉, 인정받고 싶어 하는 사람에는 인정의 말을, 상처받은 사람에게는 위로의 말을, 자존감 낮은 사람에게는 힘이 되어주는 말을, 죽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는 희망의 말을 전한다면 분명히 사람의 마음을 살리게 될 것입니다. 말이란 것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이렇게 마음을 죽고 살리는 커다란 역할을 합니다.
어떤 형제님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이 형제님께서 운전을 하는데, 차선을 계속해서 바꾸면서 난폭운전을 하는 차를 보게 되었습니다. 위험한 운전을 차를 보면서 짜증도 나고 화가 났습니다. 그래서 그 차를 향해서 “사고나 나라.”라고 말을 했습니다. 그런데 정말로 사고가 난 것입니다.
사실 이 형제님께서 난폭운전을 하는 차를 향해서 이런 말을 했다는 것을 그 누구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오랫동안 ‘내 탓’이라는 죄책감을 갖게 되면서, 운전할 때마다 기억하기 싫은 기억이 되살아났습니다. 말은 상대방뿐 아니라 내 자신에게도 이렇게 영향을 끼칩니다.
주님의 말씀은 인간의 말과는 달리 늘 희망이 가득한 말씀이었습니다. 특히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하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전해주시지요. 마태오를 향해 “나를 따라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을 묵상해봅니다. 사실 당시의 그에게는 희망이 없었을 것입니다. 어쩌다보니 먹고 살기위해서 세리라는 직업을 선택했지만, 평생 죄인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 수밖에 없었지요. 물질적으로는 넉넉했을지 모르겠지만 구원받을 수 없는 죄인이라는 생각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이런 그에게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님께서 부르십니다. 자기와 같은 죄인도 구원받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간직할 수 있게 된 순간이었습니다. 얼마나 기뻤을까요? 지금까지 자기가 누렸던 모든 부를 기꺼이 버릴 수 있는 희망을 간직할 수가 있었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희망이 없는 우리를 향해서 “나를 따라라.”라고 부르십니다. 주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사람만이 그리고 주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분명히 희망 안에서 큰 기쁨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과연 나의 이웃에게 희망을 말을 전하고 있을까요?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