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가 21, 34-36(연중 34주 토)
오늘은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우리는 이번 주 내내 종말에 관한 말씀을 들었고, 오늘은 그 마지막 결론 부분을 들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신의 죽음을 사흘 남짓 남겨둔 시점에서, 당신의 공생활을 마무리 짓는 말씀입니다. 이는 마치 약혼한 처녀에게 있어서 유일한 소망은 결혼하는 날을 기다리는 것이듯이, 우리의 궁극적인 소망도 주님의 재림을 맞이하기 위한 ‘기다림’에 있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고대하고 기다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소중함이 있다는 말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사랑하는 임을, 소중한 임을, 주님이신 벗을 기다립니다. ‘기다림’은 그야말로, 하느님의 개입이 야기 시킨 놀라움이요 경이로움입니다. 이미 우리 안에 들어와 우리로 하여금 기다리도록 부추기는 분의 활동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그저 스쳐 지나쳐 통과하시지 않으시고, 우리를 새롭게 하고 변형시키기 위해 우리 안에 오십니다. 곧 당신의 사랑과 구원에 우리를 참여시키기 위해, 우리의 역사 안에 들어오십니다.
오늘도 우리 주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승리의 개선행진에 우리를 데리고 다니십니다.”(2코린 2,14 참조). 당신 승리의 역사 안으로 우리를 동행하십니다. 주님이신 당신으로 하여, 오늘도 우리는 당신의 나라의 완성을 고대하고 기다리며, 당신의 승리의 역사 안으로 들어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기다림의 자세를 3중의 구조로 말씀하십니다. 곧 ‘기도하라’는 것이요, 기도하되 ‘깨어 기도하라’는 것이요, 깨어 기도하되 ‘늘 깨어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기도하라’는 것은 자신의 약함과 무능력과 한계를 받아들이고 주님의 능력과 선물을 믿고 소망하라는 것이요, ‘깨어 기도하라’는 것은 그분을 맞아들이기 위해 준비하고 마음을 경계하라는 것이요, ‘늘 깨어 기도하라’는 것은 이미 오신 그분을 사랑하고 동행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교가 ‘깨어남’의 종교가 아니라, ‘깨어있음’의 종교임을 알게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스스로 깨우쳐 알게 된 진리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계시된 바를 믿고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깨어나라’라고 하지 않고, ‘깨어있으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미’와 ‘아직 아니’ 사이에 놓여있음을 말해준다. 곧 이미 오신 주님께 깨어있음이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길임을 말해줍니다. 따라서 ‘깨어있음’은 이미 승리를 이루신 그리스도의 개선행진에 참여하는 일이기에, 기쁨과 활력에 넘친 희망 찬 발걸음입니다.
결국, ‘늘 깨어 기도하라’는 말은 ‘늘 동행하시는 주님 앞에 서 있어라’는 말씀입니다. 곧 지금 ‘사람의 아들 앞’에 서 있으면 깨어 기도할 것이요, 그렇지 못하고 ‘자신 앞’에 서 있으면 먹고 마시는 일과 세상 걱정에 마음을 빼앗길 것입니다. 지금 자신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사람의 아들이 오시는 그날을 갑자기 맞이하게 될 것이요, 지금 주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그날에도 역시 신랑을 맞이하듯이, 주님 서 있게 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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