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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3월 16일 _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3-16 조회수 : 345

사실 어렸을 때에는 참을성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제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만 해도 한 반에 70명 가까이 있었기 때문에, 이 안에서 손해를 보면 안 된다는 생각을 많이 했고 그래서 별 것 아닌 것으로 친구들과 다투곤 했습니다. 단적인 예로, 책상에 금을 그어 놓고서 절대로 넘어오면 알아서 하라고 협박(?)도 하지요. 

이렇게 어렸을 때를 떠올리다가 초등학생 때 친구와 크게 싸웠던 기억이 생각났습니다. 장난을 하다가 한 친구를 툭 치게 되었습니다. 이 친구는 “왜 때려!”라면서 화를 냈고, 저는 저의 실수를 인정하면서 “그래, 그러면 너도 한 대 때려.”라고 말을 했지요. 나도 한 대 맞으면 공평할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친구가 한 대 때렸는데 너무 세게 때리는 것이 아닙니까? 저는 그냥 툭 친 정도였는데 말이지요. 

이 친구의 행동으로 인해서 오히려 제가 손해 보는 것만 같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불공평해 보였습니다. 그래서 “왜 이렇게 세게 때려?”라고 말하면서 저 역시 세게 때렸고, 결국 서로 치고 박는 큰 싸움이 되고 말았습니다. 

‘공평하다’라는 말은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지지 않는 정확함일 때 가능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정확하게 나눈다는 것이 가능할까요? 눈에 보이는 물건의 정확한 나눔 조차 쉽지 않습니다. 하물며 내 마음이 받은 상처의 크기에 따라 누가 더 큰 아픔을 겪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결국 자기 아픈 것이 가장 힘들 수밖에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세상의 공평함을 따르라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 주님의 공평함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공평함은 자로 재서 정확하게 나누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무조건 사랑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주님께서 우리의 모습을 보고서 세상의 관점으로 공평하게 심판하신다면 어떨까요? 어쩌면 우리는 지금 이 세상 안에서 살아 숨쉬기가 힘들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의 공평함은 죄가 많으니까, 또 당신의 뜻대로 살지 못하니까 “너는 못되게 살았으니 사랑을 줄 수 없다.”라는 세상의 공평함이 아닙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 누구도 예외 없이 똑같이 주시는 사랑이 주님의 공평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사랑의 실천에 있어서는 공평함을 따져서는 안 됩니다. 내가 하나의 사랑을 받았으면 나 역시 딱 하나의 사랑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가 받든 받지 않든 상관없이 무조건 주는 사랑을 실천하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주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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