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4일 [연중 제15주일]
오늘 독서와 복음은 단순하게 이웃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복음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는 아름다운 사랑을 보여주지만, 독서와 복음을 모두 종합해보면 가장 중요한 계명은 바로 사랑의 계명이며, 그 계명은 높은 하늘에 있는 것도 아니고, 저 바다 건너에 있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 계명은 언제나 우리 가까이 있고 내가 실천하고자만 한다면 언제나 어디서나 지키며 실천할 수 있는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그러니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단지 이웃 사랑에 대한 가르침만은 아니다.
제1독서: 신명 30,10-14: 그 말씀이 너희에게 가까이 있어,
제1독서의 신명기 30,10-14는 하느님의 말씀이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거의 ‘접근할 수 없음’을 설명하는 것 같다.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계명은 너희에게 힘든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늘에 있지도 않다. 그러니 ‘누가 하늘로 올라가서 그것을 가져다가 우리에게 들려주리오! 그러면 우리가 실천할 터인데.’하고 말할 필요가 없다...사실 그 말씀은 너희에게 아주 가까이 있다. 너희의 입과 너희의 마음에 있기 때문에, 너희가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신명 30,11-14).
이것은 사랑의 계명이 아주 힘들고 어려운 것이지만, 사마리아 사람과 같이 항상 ‘실천’하려고 할 때, 우리의 체험은 이 어려운 계명과 ‘가까워’질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계명만 주실 뿐 아니라, 실천할 수 있는 힘도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이 가능한 것은 바로 그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이신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그분과 더불어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복음: 루카 10,25-37: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구약에서 ‘이웃’이란 말은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을 말하였다(레위 19,33-34). 이것이 예수님 시대에는 종교적, 정치적 집단의 그룹의 한 구성원을 의미하는 듯이 축소되었다. 예를 들면, 바리사이, 에세네파, 열성당원, 헤로데 당원 등이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이기주의적인 테두리를 없애시면서 사랑의 개념을 무한히 확대시키신다.
친구이든 적이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어떻게 만나든지 간에 그를 만나게 된 사람 모두에게 ‘이웃’이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버렸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이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드리겠습니다.’하고 말하였다.”(30-35절).
예수님의 관심은 온통 그 인물들의 묘사에 집중되고 있다. 이 등장인물들을 보면 우리의 생각과는 정 반대로 그 행동이 나타나고 있다. 종교의식을 수행하는 사제와 레위 사람은 누구보다도 이웃사랑에 대한 계명을 잘 알고 있었을 텐데,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리고 만다.’
사마리아 사람은 외국인이었고 유다인들에게 괄시를 받는 사람이었기에 그 강도 사건에 말려들어 의심을 받고 죄를 뒤집어 쓸 수도 있었지만, 그 사람의 상처를 보고 응급치료를 해주며, 또 자기 일처럼 처리한다. 그의 시간과 가진 돈은 더 이상 그의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것이 되고 만다. 게다가 앞으로 필요한 그 모든 것에 대해서까지도 책임을 지겠다고 한다.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드리겠습니다.’(35절). 참으로 모든 것을 인간을 위해 애쓰는 사람이다.
이 역할 분담은 예수께서 의도하시는 명백한 어떤 쟁점이 있다.
1. 형제들을 통해 하느님을 알아보는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는 형식주의적인 전례, 결실 없는 예배행위를 반대하시는 것이다. 즉 구원을 위해서 단지 하느님을 믿는 것으로 만족하고, 하느님의 모상대로 창조되고 구원된 인간을 신뢰하지 못하게 하는 그런 예배행위를 반대하시는 것이다. 사제와 레위인의 잘못은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에 대한 두 계명 사이의 밀접하고도 필연적인 일치의 관계를 보지 못하는 데 있다.
2. 선을 어떤 일부 사람들에게만 편중시키는 사회적 종교적 차별주의와 민족적 편견을 반대하시는 것이다. 유다인들에게는 외국인이며, 이교도인 사마리아 사람이 경건한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하지 못한 사랑의 행위를 실제로 실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행위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더 정확히 말하면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실천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선은 국경이 없을 뿐만 아니라, 우리 각자가 처하게 되는 낯선 모든 처지에서 창조적 능력을 통해 실현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사마리아 사람이 했듯이 하여야 할 것이다.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 대하셨다.
이 비유는 실제로 아주 지극히 실천적인 어조로 끝을 맺는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 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36-37절).
누가 우리의 이웃인지를 아는 것만으로는 족하지 않다. 비유는 상처 입은 사람이 반쯤 죽어 길에 버려져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분명히 말해 주고 있다. 이웃에 대해 내가 이웃이라는 것을 입증해 보이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비록 그가 실제로 바로 우리 곁에 있다 하더라도, 즉 목전에 두고서도 우리가 그를 보지 못한다면 그는 여전히 아주 멀리 있을 것이다.
참 사마리아 사람은 그리스도
등장인물 중에 가장 이상한 사람은 사마리아 사람이다. 그런데 그 사마리아 사람처럼 사랑할 수 있었던 ‘어떤 사람’이 있었는데 바로 그가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은 참으로 인간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셨다. 비록 하느님의 드높은 ‘성전’에서 내려오시지만 길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던 그 불행한 일을 당한 사람을 돌보는 것이 자신과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마리아 여행자가 길에 쓰러져있는 사람을 본다. 그는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왜냐하면 여행 목적이 우리를 ‘방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그는 그 사람의 상처 위에 포도주 즉 말씀의 포도주를 붓고 그 깊은 상처가 포도주의 기운을 견뎌내지 못하기 때문에 기름을 섞어 바른다. 그처럼 그는 자신의 온순함과 박애정신으로 바리사이파 사람의 비난을 견뎌낸다.... 그 다음 그 사람을 여관으로 옮겨간다. 그는 그 여관의 이름을 모든 사람들의 거처요 피난처인 ‘교회’라고 붙여준다...”(Severo D'Antiochia, Omelia, 8,9).
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그리스도론적 관점에서 폭발적인 힘을 찾게 된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37절)라는 마지막 말은 이 사랑의 실천이 더 이상 생각으로나 시도해불 수 있는 비현실적인 것이거나 공상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이 말씀은 여전히 계속해서 실현되고 있는 무한한 사랑의 역사와 체험 즉 우리 모두를 위해 자유롭고 인정 많은 사마리아 사람이 되신(요한 8,48) 그리스도의 역사를 다시 시작케 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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