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책을 읽다가 “사...랑...해...”라는 구절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냥 단순하게 “사랑해”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말줄임표를 사용하면 어떻습니까? 저자가 말하는 사랑에 잠시 머무르면서 한 번 더 사랑에 대해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얼마나 어려운 사랑을 선택했는지, 사랑 고백의 힘듦에 대해 느끼게 됩니다.
사랑을 느끼고 실천하는 것은 이렇게 말줄임표와 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 자리에 잠시 머무르고, 한 번 더 깊이 생각하는 것 안에서 사랑은 피어나게 됩니다. 하지만 잠시 머무는 것을 힘들어 합니다. 또한 깊이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도 어려워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의 삶은 너무나도 많은 ‘빨리빨리’에 젖어 있기 때문입니다.
운전할 때를 떠올리면 이런 부분은 분명해집니다. 앞 차가 너무나도 너무 천천히 간다고 경적을 울리고 앞 차에 바짝 대어서 위협을 하듯이 운전합니다. 그런데 앞 차의 운전자가 지금 운전을 힘들어하고 있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잠시 앞 차 운전자의 마음에 잠시 머무르고, 한 번 더 생각한다면 여기에서 앞 차 운전자를 배려하는 사랑의 마음이 나오게 됩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차가 굉음을 울리면서 과속하며 앞으로 갈 때에도 역시 머무르고 생각해보십시오. ‘급한 일이 있나 보다.’라는 사랑의 마음을 간직할 수 있습니다.
그저 사랑한다고 말만 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습니다. 사랑이라는 말만 하는 관념적인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현실이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바로 잠시 그 자리에 머무는 것, 그리고 한 번 더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말씀을 전해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강도를 만나 초주검이 된 사람의 이웃이 된 사람은 누구였냐고 물으시지요. 먼저 사제와 레위인은 길반대편으로 피해갑니다. 아마도 자신들의 직무와 무관하다고 생각했을 테고, 또 피해자가 죽은 줄 알고 시체에 손을 대서 부정을 타지 않으려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복잡한 일에 엮이기 싫다는 단순한 이유만을 내세워서 그 사람에게 머무르려 하지 않았고, 한 번 더 생각하지도 않았습니다. 사랑의 실천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마리아 사람은 달랐습니다. 당시 사마리아 사람들과 유다인들은 서로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이유만을 내세워서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난 사람을 버려둘 수도 있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가지 않는 예루살렘에서 왔다는 것만으로 유다인으로 간주할 수 있기 때문이지요. 이 상황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머물렀고 한 번 더 생각하면서 사랑을 행합니다.
우리 역시 진정한 이웃이 되어야 한다면서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고 말씀하십니다. 제1독서에도 나오듯이 사랑은 우리에게 아주 가까이 있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실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야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믿고 따르는 참된 제자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