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를 시작하면서 신자들이 봉헌한 미사예물에 적혀 있는 지향을 읽습니다(물론 지향이 너무 많으면 읽을 수가 없지만 최대한 읽으려고 노력합니다). 사실 미사지향이 제대 위에 올라가 봉헌되었다는 것이 중요하지, 미사지향을 읽는 것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읽는 이유는 저 역시 이 지향으로 기도하겠다는 마음을 갖기 위해서입니다.
따라서 제대 위에 봉헌되었다는 것을 기억하면서, 이 봉헌의 마음으로 사제와 함께 미사를 하면 됩니다. 하지만 지향이 불리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분들이 계신 것 같습니다. 언젠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미사 후에 어떤 자매님께서 제게 와서 기분 좋지 않았다고 말씀하시더군요. 미사 지향에 적혀 있는 이름을 잘못 불렀다는 것입니다. 우선 사과를 하면서 봉헌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지만 영 마음이 좋지 않은 것 같더군요. 봉헌한 것으로 충분해야 하는데, 그 이상을 생각하기에 봉헌 자체에 머무르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사진 찍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찍은 사진이 모두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닙니다. 특히 초점을 정확하게 맞추지 못했을 때에는 어쩔 수없이 지우게 됩니다. 사진을 찍을 때 중요한 것 중에 하나가 초점을 제대로 맞추는 것입니다. 즉, 내가 찍고 싶은 곳에 정확하게 초점을 맞춰야 원하는 사진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들의 삶 안에서도 그런 것이 아닐까요? 중요한 것에 초점을 맞추고 살아야 하는데, 부수적인 것에 더 큰 관심을 보이면서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보면,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예수님의 시신이 없어졌다고 울고 있습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향해 “선생님께서 그분을 옮겨 가셨으면 어디에 모셨는지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제가 모셔 가겠습니다.”라는 말을 하지요. 여기서 의문이 하나 듭니다.
왜 마리아 막달레나는 그토록 사랑했던 예수님이었는데 알아보지 못했을까요? 마리아의 초점은 예수님께 맞춰져 있지 않고, ‘죽음’에 맞춰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서 엉뚱한 말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지요.
주로 세속적인 것들은 크고 화려해서 내 눈에 확 띄게 마련입니다. 그래서인지 어디에나 계시는 주님이지만, 그 곳에 계신 주님을 발견하기란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다른 것들이 내 눈을 가득 채우고 그것에만 관심을 갖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주님께 초점을 맞출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주님의 뜻을 마음에 새기고 적극적으로 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제가 주님을 뵈었습니다.”라는 마리아 막달레나의 고백을 우리 역시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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