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분이 자기 공동체의 한 사람 때문에 힘들다는 말씀을 하십니다. 분명히 맞지 않는 것 같은데도 자신이 주장한 것은 어떻게든 관철하기 위해서 목소리를 키워서 억지를 부린다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미워하게 되고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미움의 상태에 있으니 너무나 힘들다는 것이었지요. 이런 생각들을 그분에게 직접 이야기해보면 어떻겠냐는 조언을 해보았습니다. 그러자 자신은 못 하겠다고 합니다. 자기주장이 너무 강한 이 사람과 이야기를 하면 오히려 자신이 너무나 힘들어진다는 것이었지요. 그러면 계속 이 힘든 관계를 간직하며 살겠냐고 물었더니 “어쩔 수 없지요. 기도만 할 뿐이에요.”라고 대답하십니다.
이분과의 대화를 통해 어떤 분인지를 조금 알 수 있었습니다. 소극적인 성격이었고, 싫어하는 사람은 반대로 적극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분이었습니다. 이렇게 소극적인 사람은 대체로 적극적인 사람을 탐탁지 않게 여깁니다. 그의 확신에 찬 적극성이 자신의 연약함, 비겁함, 방종 등을 비난하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적극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소극적인 사람을 마찬가지로 탐탁지 않게 생각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소극적인 그 마음이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원래 그렇다면서 어쩔 수 없다고 할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상대방이 바뀌길 바라는 것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힘을 빌려 기도만 한다면 이루어질까요? 마치 우리나라와 일본이 축구 경기를 하는데, 우리나라가 이기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만약 일본의 가톨릭 교우 역시 ‘우리나라가 이기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한다면 하느님께서는 누구의 기도를 들어주셔야 하겠습니까?
사랑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라도 한 번 더 용기를 내서 적극성을 보이는 것입니다. 할 수 없다면서 포기했을 때에는 아무런 변화도 이루어지지 않겠지만, 용기를 내어 사랑으로 행동했을 때에는 내가 바뀌고 더불어 내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가 있습니다. 따라서 지금 나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고 곧바로 행할 수 있는 적극성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사람의 아들이 올 것이니 준비하고 있으라고 하십니다. 그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셨지요. 하지만 그날은 분명히 우리에게 올 날이기 때문에 늘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주님께서는 힘주어 말씀하십니다.
혼인 잔치에서 돌아오는 주인을 맞이하는 종은 낮이나 밤중이나 새벽 모두 깨어 있어야 한다고 하시지요. 이는 인간의 세 시기인 소년기, 장년기, 노년기를 뜻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생 내내 참회와 믿음으로 주님의 뜻을 따르면서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일을 하지 못하는 이유를 찾아서는 안 됩니다. 또 나 자신의 처지에서만 바라봐서도 안 됩니다. 주님의 편에서 바라보고 성실하게 주님의 일을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행복한 우리가 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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