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학교에 들어가기 전이 생각납니다. 고3 때에 분기별로 모의고사를 보게 되는데, 자신이 지원하는 대학명과 과 이름을 적으면 몇 명이 지원했고 그중에서 몇 등인지가 인쇄되어 나왔습니다. 저는 늘 서울 가톨릭대학교 신학과를 적어냈고, 그때마다 합격이라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지원자가 그리 많지 않아서 정원보다 조금 넘거나 미달이었거든요. 그러다 보니 굳이 열심히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정말로 열심히 공부한다는 고3 시절이 제게는 가장 많이 놀았던 시간이 되었습니다.
이제 학력고사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놀라운 정보 하나를 얻게 되었습니다. 신학교는 정원제가 아니라 점수제라는 것입니다. 즉, 정원 미달이 되어도 성적이 낮으면 불합격된다는 것이었지요. 몇 명이 합격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몇 점이어야 합격하느냐가 중요했습니다. 지원자가 적다고 좋아할 것이 아니라, 점수를 무조건 올려야만 했습니다. 그때부터 정말로 열심히 공부한 것 같습니다.
주님의 특별한 은총으로 무사히 신학교에 합격했고 이렇게 신부도 되었지만, 만약 그때 정원제가 아니라 점수제라는 사실을 몰랐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싶습니다. 혹시 신부가 아니라 신랑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지금도 신학교는 어느 정도 정원에 맞추기는 하지만 학교에서 원하는 점수가 되지 않으면 미달이라고 해서 합격시켜주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 방식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문에 들어가는 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주님, 구원받을 사람은 적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겠느냐는 질문이었습니다. 아마 정원이 몇 명이고 몇 명이나 구원의 문에 들어갈 수 있느냐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은 몇 명이 구원받는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어떻게 해야 구원받는지를 말씀하시지요. 즉, 얼마나 많이 구원받느냐보다 어떻게 해서 구원받을 것인지가 더 중요함을 알려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 함께 식사했다고 해서 종말의 잔칫상에 앉는다는 보장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즉, 미사에 열심히 참석했다고 해서, 성당에 얼굴을 자주 비췄다고 해서 구원의 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뜻을 반하는 불의를 일삼는 사람들을 향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어디에서 온 사람들인지 나는 모른다. 모두 내게서 물러가라, 불의를 일삼는 자들아!”
구원에 정원이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미달이라고 불의를 저질러도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하느님 뜻을 철저하게 따르는 의로운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