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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9월 2일 _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09-02 조회수 : 402

똑똑한 지식인들, 특별히 과학자나 최첨단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 중에는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이들 가운데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사람이 더 많다고 합니다. 합리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믿는다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합리적인 사고를 가지고 있기에 믿는다고 하십니다. 그들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의 논리로는 우리의 작은 뇌를 사용해서 밝힐 수 없는 진실이 많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따라서 하느님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 훨씬 더 합리적이다.”

어떻습니까? 하느님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이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그 존재를 믿는 사람이 훨씬 더 합리적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자신을 스스로 합리적이라고 말하면서도 전혀 합리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나아갑니다. 하느님은 당연히 내 존재를 뛰어넘는 분이신데, 자기 생각을 벗어나면 이해할 수 없다면서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어떤 분입니까? 오늘 예수님께서는 하늘나라를 선포하시면서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을 인용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사람이 되신 하느님의 사랑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말씀을 마치고 자리에 앉으시니,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고 전합니다. 실제로 주시한 사람은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제대로 주시한 것입니다. 

우리 역시 이런 모습을 갖는다면 어떨까요? 반면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라면서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스스로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존재를 뛰어넘는 분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들이 거룩한 예언자나 아주 비범한 인물에게서 이루어지리라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믿음은 자신들만의 생각일 뿐입니다. 엘리야가 사렙타 과부에게만 갔고, 엘리사가 시리아 사람 나아만만 고쳐 주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이렇게 우리의 생각을 언제나 뛰어넘었습니다. 

우리는 과연 하느님의 사랑을 제대로 주시하고 있을까요? 그래서 그분 안에서 희망과 기쁨을 간직하고 있을까요? 혹시 좁기만 한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 ‘믿을 수 없다’라고 외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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