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마다 30km 정도 자전거를 탑니다. 출발하는 시간은 새벽 5시 30분쯤, 주위가 어두운 시간이라 보이는 것도 없고(자전거 라이트를 켜면 바로 앞에만 잘 보입니다) 사람들도 없습니다. 이렇게 약 1시간 30분 정도 자전거를 타니 조금 지루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어폰을 귀에 꽂고 음악을 들으면서 자전거를 탑니다.
어제 아침에도 음악을 들으면서 자전거를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르막길에서 어느 할아버지께서 저를 향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자전거 속도를 줄여서 “어르신, 왜요?”라고 묻자, “강화 읍내 가는 버스가 언제 오나?”라고 물으시더군요. 분명히 버스가 올 때가 되었는데 오지 않으니 자전거 타고 가고 있는 저를 세워 물어보신 것입니다.
버스 시간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었지만, 매일 자전거를 타면서 거의 이 시간에 버스가 지나갔던 것을 기억하면서 조금만 기다리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자전거를 타고서 이어폰을 귀에 꽂으려는 순간, 오늘은 아무것도 듣지 않고 가야겠다 싶었습니다. 이 할아버지를 눈으로 먼저 보았기 때문에 멈춰서서 말씀을 들을 수가 있었지, 만약 보지 못했더라면 할아버지를 그냥 지나치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제까지 이런 식으로 스스로 차단했던 소리가 얼마나 많았을까요? 특히 다른 이들의 도움을 잘 듣고 있었는지를 생각해봅니다. 이러한 반성으로 이어폰을 다시 꽂을 수가 없었습니다. 더 많은 사람에게 귀 기울이고, 더 많은 말을 귀담아들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주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할 수 있는 길은 먼저 들을 때에 가능합니다.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오는 이 말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일어나 그분을 따를 수가 있었습니다.
마태오 사도는 세리로서 많은 재산을 축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돈만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많은 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어서 복음서를 집필하기도 하지요. 여기에 오늘 복음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많은 사람을 초대해서 식사하는 것을 보면 사교적인 면에서도 뛰어난 면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인간적인 면에서 볼 때, 사는 데 있어서 부족한 면이 전혀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욕심 자체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그래서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부르심에 곧바로 따를 수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 욕심을 내려놓을 수 있었던 마태오 사도를 보면서 우리 자신을 떠올려 보았으면 합니다. 욕심과 이기심으로 내 귀를 막아서 주님의 목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무엇보다도 중요한 주님의 구원을 놓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