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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1월 11일 _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11-11 조회수 : 373
2019. 11. 10 연중 제32주일

루카 20,27-38 ( 부활 논쟁 )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두가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물었다. “스승님, 모세는 ‘어떤 사람의 형제가 자식 없이’ 아내를 남기고 ‘죽으면, 그 사람이 죽은 이의 아내를 맞아들여 형제의 후사를 일으켜 주어야 한다.’고 저희를 위하여 기록해 놓았습니다. 그런데 일곱 형제가 있었습니다. 맏이가 아내를 맞아들였는데 자식 없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둘째가, 그다음에는 셋째가 그 여자를 맞아들였습니다. 그렇게 일곱이 모두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죽었습니다. 마침내 그 부인도 죽었습니다. 그러면 부활 때에 그 여자는 그들 가운데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일곱이 다 그 여자를 아내로 맞아들였으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이 세상 사람들은 장가도 들고 시집도 간다. 그러나 저세상에 참여하고 또 죽은 이들의 부활에 참여할 자격이 있다고 판단 받는 이들은 더 이상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을 것이다. 천사들과 같아져서 더 이상 죽는 일도 없다. 그들은 또한 부활에 동참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 그리고 죽은 이들이 되살아난다는 사실은, 모세도 떨기나무 대목에서 ‘주님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라는 말로 이미 밝혀 주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

< 지금여기에서 하느님과 함께 >

지금여기 언제나처럼
하느님께서 함께 하시는데

오직 하느님만이 아시는
죽음 이후 주님과의 만남을 그리며
지금의 만남에 소홀하지 않으렵니다

지금여기 살아가면서
하느님 뜻 헤아리며
올곧게 펼치기도 버거운데

오직 하느님만이 아시는
죽음 이후 삶을 상상하며
지금의 삶을 저당 잡히지 않으렵니다

언젠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야할 사람으로서

하지만 삶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조차
온전히 알 수 없는 사람으로서

영원하신 하느님을
인간적으로 이해하고 표현하려는
어리석음을 벗어던지고

있는 그대로의 하느님과
그저 몸과 마음으로 함께 하는
지혜로움을 지니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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