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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2월 24일 _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9-12-24 조회수 : 279
사랑이 무엇일까요? 누구는 사랑의 어원이 ‘사량’, 생각의 양에 있다고 하면서 사랑을 ‘생각한다.’라고 말합니다. 이 말에 일리가 있다고 봅니다. 사랑하면 계속 그 상대방이 생각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얼마만큼 생각해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요? 한 번? 두 번? 아닙니다. 계속 생각나야 사랑이라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옛날의 어떤 유행가 가사처럼 ‘앉으나 서나 당신 생각’이 사랑일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조건이 하나 들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즉, 보고 싶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미움과의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미운 사람도 계속 생각나지 않습니까? 물론 이때는 ‘앉으나 서나 그놈 생각’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미운 사람의 큰 차이는 보고 싶고, 보기 싫고의 차이입니다. 실제로 계속 보지 않으면 사랑의 마음도 사라집니다. 옛날 짝사랑하던 사람을 오랫동안 보지 못하게 되면서 사랑하던 생각도 사라지지 않습니까? 심지어 이름도 모를 때도 있습니다. 사랑이 없어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랑을 강조하셨습니다. 단순히 사랑하는 마음만 간직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또 상대방이 원하는 것만을 해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어쩌면 계속 생각하고 보고 싶은 사람이 내가 되어야 그 사랑도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내가 먼저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사랑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래서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의 모습이 아닌, 연약한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인간에게 무엇인가를 받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주시기 위해 오신 것입니다.

이 점을 오늘 복음의 즈카르야가 노래로써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찾아오시어 그들을 모든 육적, 영적 원수들로부터 구해 주실 것이라는 당신의 약속을 지키셨다는 것을 노래합니다. 얼마나 큰 사랑입니까?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온전히 우리 인간을 사랑하기 위해 연약한 인간의 육체를 갖추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더욱더 함께 해야 할 분으로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제 그토록 보고 싶었던 주님께서 오늘 밤 이 땅에 강생하십니다. 우리는 과연 주님을 향해 어떤 찬미를 드리고 있습니까? 혹시 그분의 사랑을 보지 못해서 찬미보다는 불평과 원망의 노래를 드리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사랑을 받을 수 있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더욱더 노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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