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엘리베이터가 이상하게도 층마다 서는 것입니다. 제 옆에 있던 사람들도 답답한지 한소리를 합니다. 그리고 드디어 엘리베이터가 섰는데, 이 안에 조그마한 아이 혼자 타고 있는 것입니다. 이 아이는 엘리베이터의 층수 버튼을 모두 눌렀다가 해제하기를 반복하고 있었습니다. 한 형제님께서 아이를 향해 화를 내십니다.
“뭐 하는 거야? 네 엄마 어딨어?”
아이는 울먹이다가 울음을 터뜨립니다. 바로 그때 이 형제님의 아내로 보이는 분이 형제님을 나무라며 말합니다.
“왜 애를 혼내요? 아이는 버튼 누르는 것을 좋아하는 것 몰라요?”
그리고 아이에게 “버튼 누르는 것은 괜찮은데 이렇게 모두 눌러 놓으면 바쁜 사람들이 화난단다. 다음에는 이렇게 하면 안 돼요. 알았지?”라며 아이를 다독이고 이렇게 해서는 안 되는 이유까지 말씀해주십니다.
아이는 보통의 아이들처럼 좋아하는 것을 했을 뿐입니다.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이유조차 모릅니다. 그래서 억울해서 울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을까요?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하는 말과 행동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자기만 옳다고 생각하는 착각까지 겹쳐서 더욱더 인간관계를 힘들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바리사이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들은 자신들이 완전하다고 여기는 생활 방식을 따랐고, 자기네 방식이 다른 어떤 것보다 낫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손을 닦지 않는 예수님 제자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를 따끔하게 혼내십니다. 남의 잘못만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잘못은 보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겉으로만 그럴듯한 모습이 아닌 우리의 내적 지향을 보시는 하느님을 생각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그들은 하느님의 법에 어긋나는 가짜 규정을 덧붙이면서도 자신들이 생각이 옳다면서 그 생각이 율법에 근거한다는 논리를 세웁니다. 대표적인 예가 부모 공양에 대해 ‘코르반’이라고 말하면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부모가 굶주리는데도 자녀는 제물 봉헌만으로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보시는 우리의 내적 지향이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에 기초하지 않는 어떤 판단도 주님을 기쁘게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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