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3일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예레미야 20,10-13
요한 10,31-42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잘 알고 있습니까?
예루살렘에서 다시 한번 참으로 놀라운 일, 천부당만부당한 일이 벌어집니다.
예수님의 말씀 앞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셨습니다.
그냥 돌이 아니라 한대 맞으면 정신을 잃을 정도의 살상용 돌입니다.
참으로 배은망덕하며 몰지각한 유다인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의 육화강생은 너무나도 과분한 은총입니다.
수백 번 수천 번 감사를 표해도 모자랄 사건입니다.
너무나도 감지덕지한 황송스런 사랑입니다.
그러나 유다인들의 하는 짓을 보십시오.
감사를 표하기는커녕 손에 손에 하나씩 돌을 들고 있습니다.
누군가를 향해 돌을 들고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의도적이며 적극적인 ‘살의’가 있다는 것입니다.
죽이기로 마음먹고 달려든다는 것입니다.
이런 동족들 앞에 예수님께서 느끼셨던 배신감, 비애감은 그야말로 하늘을 찔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모습을 보십시오. 진노하시지도 않으십니다. 징벌을 내리지도 않으십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불쌍하고 가련한 마음에 또 다시 설득하십니다.
끝까지 대화의 창구를 열어놓으십니다.
그리고 간곡히 당부하십니다.
“그게 아니란다. 정말 그러면 안 되는 것이란다.
지금이라도 돌아가는 분위기 파악하고 마음 바꿔먹어라. 내게로 돌아와라.”
우리 인간들의 배은망덕함, 돌까지 드는 노골적인 적대감 앞에서도 끝까지 인내하시는 예수님,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생명의 위협 앞에서도 항상 우리들의 영혼, 우리들의 구원을
먼저 생각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이 돋보입니다.
첨예한 논쟁이 계속되던 어느 순간, 유다인들은 화가 머리 끝까지 나서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일어섰습니다.
그러나 아직 아버지께서 정해주신 때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하셨던 예수님께서는
민첩하고도 지혜롭게 그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셨습니다.
겨우 적대자들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오신 예수님께서는 요르단 강 건너편, 세례자 요한이 세례를 베풀던 장소로 건너가셨습니다.
집요하고도 표독스러운 예루살렘의 유다인들과는 달리 단순하면서도 순박했던 그 지역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했고 그분을 믿었습니다.
구원자로 이땅에 오신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을 환대하고 사랑하기는 커녕,
정면으로 거부하고, 모독하고, 죽이기 위해 손에 돌을 들고, 마치 가축처럼 이리 저리 몰고 다니는 유다인들의 반역은 혀를 내두를 지경입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무한한 권능을 부여받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당신 자신을 끝까지 거부하고 폭력을 행사하려는 유다인들을 무한한 인내로 참아내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또한 경이롭습니다.
이천년 전 유다인들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직도 수두룩합니다.
자신의 방식대로 예수님을 바라보고, 자기 마음대로 그분의 말씀을 해석하려는 유혹들이
오늘 우리들 안에서도 남아있습니다.
자기 만족에 머무르는 신앙,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회색 신앙은 예수님을 오해하고 왜곡하는 것을 넘어 배척하는 행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을 진정으로 잘 알고 있습니까?
참으로 그분을 메시아로 고백하고 있습니까?
그분을 하느님의 외아들이요 하느님과 일심동체, 더 나아가 하느님 자체이심을 믿고 있습니까?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당신께서 알려주신 진리의 말씀을 전적으로 수용하고, 그로 인해 자유로운 사람이 되라고 초대하십니다.
그 어떤 기득권이나 고정관념의 환상, 아집이나 위선으로부터 벗어나 온전히 자유로운 존재가 되라고 촉구하십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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