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 그리고 지금 하는 일에 대한 후회가 밀려들 때가 있습니다. 즉,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라는 생각이 들 때를 말합니다. 이런 상태에 있을 때 어떻게 스스로를 바라봅니까?
한심하다고 자신을 자책할 수도 있지만, 사실 이런 생각을 많이 하는 사람이 잘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물론 이 생각만 하고 있다면 아무런 변화가 있을 수 없고, 그냥 사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하면 할 일이 떠올려지지 않습니까? ‘이러고 있으면 안 되니 지금 할 일은 무엇인가?’라면서 지금 해야 할 일의 숫자를 늘려줍니다. 그 순간 내 인생은 바뀌게 됩니다.
신학교에 처음 들어가서, 외출도 할 수 없는 기숙사 생활을 하며 자유를 억압받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첫 방학이 되자마자 자유를 만끽하면서 사는 데 집중했습니다. 기도도 하지 않고, 대신 친구와 만나서 신나게 놀았습니다. 이렇게 며칠을 놀다 보니 어느 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
그 뒤 다시 신학생답게 살 수 있었습니다. 기도와 묵상을 하면서 마음의 평화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라는 생각을 자주 해야 합니다. 그래야 스스로 변화를 하고 성장할 수 있게 됩니다. 이 생각이 사라지는 순간, 시간만 보내면서 그냥 사는 것이 되고 맙니다.
유다의 배신을 봅니다. 그는 세상의 물질적인 것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그 관심이 예수님을 은돈 서른 닢에 팔아넘기는 행동으로 넘어갑니다. 팔아넘길 생각을 했을 때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라고 생각했다면 어떠했을까요? 또 예수님께서 그에게 회개할 시간을 주시려고 이름을 밝히지 않고 당신을 팔아넘길 사람이 있음을 말씀하셨을 때,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라고 생각했다면 어떠했을까요? 회개하지 않자 그 배신자가 유다임을 나와 함께 빵을 적시는 자라고 말씀하셨을 때,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라고 생각했다면 어떠했을까요?
유다는 그러한 생각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특히 예수님께 대한 사랑과 존경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호칭의 변화에서부터 알 수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주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물을 때, 유다만이 “스승님, 저는 아니겠지요?”라고 묻습니다.
주님의 뜻과 멀어지는 마음이 들었을 때,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것들에 더 마음이 쏠리게 될 때, 자기 자신을 다시금 되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지?’라는 생각을 하면서, 지금 해야 할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주님을 배반하는 마음도 되돌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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