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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4월 13일 _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04-13 조회수 : 304

사람 사이의 관계와 거리를 인류학자 에드워드 홀은 ‘개체공간’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습니다. 모든 개체는 자신의 주변에 일정한 공간이 필요하고, 다른 개체가 그 안에 들어오면 긴장과 위협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가족과는 20cm, 친구와는 46cm, 회사 동료와는 1.2m 정도의 거리가 있을 때 안정감을 느낀다고 말합니다. 여기에는 단지 물리적 거리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거리도 포함됩니다. 아무리 친한 사이, 사랑하는 사이라도 적절한 거리가 필요합니다. 가까운 사이라고 해서 함부로 그 거리를 침범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우리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이 이론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사실 가까운 관계라는 이유로 상대방의 영역에 침범하는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이런 공격들이 쌓이고 쌓여서 의도적으로 더욱더 멀리하게 되고, 때로는 가까운 사이에서 원수의 관계로 바뀌게도 됩니다. 

적당한 거리를 지켜주는 것이 상대방을 인정하고 사랑하는 행동입니다. 이때 서로를 더욱 아낄 수가 있으며, 그 관계가 좋은 모습으로 성장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이 거리를 지켜주셨습니다. 먼저 무덤을 찾아온 여인들에게는 천사를 보내셔서 당신이 부활하셨음을 알립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소식을 전하러 달려가는 중에 부활한 당신의 모습을 직접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자 여인들은 다가가 엎드려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합니다. 거리가 좁혀진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거리를 지켜주시면서 우리가 당신 곁으로 가까이 올 수 있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여인들에게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게 하십니다. 제자들과의 거리도 좁히기 위해서는 아직 직접 만나야 할 때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과 믿음의 크기에 따라 주님께서는 늘 거리를 두십니다. 이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는 우리의 사랑이 커야 하고, 또 주님께 대한 믿음이 굳건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께서 직접 그 거리를 좁혀주시기만을 원합니다. 문제는 그 거리를 좁히려는 이유가 다른 곳에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채워주시는 주님, 나의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도구로서만 주님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서는 진정으로 주님과의 거리가 좁혀질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주님과의 거리가 더욱더 멀어질 뿐입니다. 

주님과의 거리를 좁힐 수 있도록 더 많은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랑 그 자체이신 주님께 대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도 무덤을 찾아온 여인처럼 그분의 발을 붙잡고 절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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