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2주일
두려움을 뛰어넘은 믿음의 삶
[말씀]
■ 제1독서(예레 20,10-13)
남 유다 왕국이 몰락을 향하던 기원전 6세기, 예언자 예레미야는 이 왕국의 비극적 운명을 내다보며, 눈먼 동족들에게, 아니 눈이 먼 상태로 남아 있기를 고집하던 동족들에게 재앙을 예고해야 하는 사명 앞에 선다. 사실 그는 침묵하기를 바랐으나, 주님의 부르심은 강력했기에 핍박을 무릅쓰고 입을 열어야만 했다. 예언자는 동족들의 호응을 다 잃어버린 상태에서 고독을 절감한다. 그러나 그는 극도의 번민 속에서도 굳건한 믿음으로 주님을 향한다.
■ 제2독서(로마 5,12-15)
죽을 운명을 거부하면서 인간은 종종 하느님 자리에 서고자 하나, 이는 실상 자신에게 주어진 삶, 죽음을 포함하는 참된 삶을 거부하는 모습이다. 사도 바오로는 원죄에 관한 기사 속에서 인간의 이러한 유혹을 적시하는 가운데 이 죄가 모세의 율법을 어기는 행위보다 더 근원적임을 밝힌다. 그리스도는 죽음 앞에서 사랑의 삶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여주셨으며, 그분을 통해서 이제 죽음 너머의 세계, 곧 은총의 세계가 펼쳐진다. 이 세계는 두려움의 반대 개념인 믿음으로 열리는 세계이다.
■ 복음(마태 10,26-33)
복음저자 마태오 공동체는 유다교 한가운데에 살면서 죽음 또는 최소한 머물고 있던 세계에서의 추방이라는 현실로 위협을 받고 있었다.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선교로 파견하시며 내리신 말씀들을 상기시키면서, 복음저자는 동시대의 신자들에게 확신을 심어주고자 한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람들을 지키실 것이기에, 박해자들은 결코 참된 삶을 파괴하지 못할 것이라 단언한다. 따라서 신앙인들은 어떤 두려움이든 털어버려야 하며,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선포해야만 한다.
[새김]
■ 두려움은 세상 어디에나 존재하며, 특히 권력이 억압을 앞세우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다. 전체주의적 이념을 명분으로 가해지는 위협 앞에서 어찌 우리의 생각을 드러낼 수 있겠으며, 나아가 어찌 생각조차 할 수 있겠는가? 힘 있는 자들과 타협하지 않는다는 것은 자칫 자기 자신 또는 자신이 아끼는 사람들을 죽음의 길로 내몰 수도 있다. 그러나 이보다 훨씬 광범위하게 펼쳐지는 두려움 앞에서, 특히 죽음 앞에서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 반응을 보인다. 의사 표명을 포기하고 입을 다물든지, 아니면 적극적인 자세로 생각을 표현하든지...
■ 억압과 죽음은 언제나 두려움의 선상에 머물러 있다. 자기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기를 포기한다는 것은 결국 남의 판단에 자신을 내맡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남의 눈에 우리가 아무것도 아닌 존재임을 털어놓는 결과를 낳으며, 아울러 자기 자신의 눈에도 그렇게 보이게 만든다. “너희를 죽이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는 주님의 말씀은 이제 “두려움을 갖는 삶은 참된 삶이 아니다”로 다가온다. 우리 신앙인들에게 두려움이 차지하고 있던 자리는 본디 믿음의 자리였다. 믿음만이 우리에게 온전한 자유를 누릴 수 있게 하고 기꺼이 사랑을 실천할 수 있게 하며 담대히 말씀을 전할 수 있게 한다.
교우 여러분, 주님께서 지켜주시는데 두려움에 떨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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