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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6월 24일 _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06-24 조회수 : 326

말을 그린 두 장의 그림이 있습니다. 하나는 작은 부분까지 꼼꼼하게 색칠을 하는 등 누가 봐도 정성이 가득 담겨 있는 그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휙휙 그린 그림으로 도저히 정성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냥 장난삼아 끄적인 그림 같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그림이 더 잘 그렸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정성이 담겨 있어 보이는 그림은 6살짜리가 그린 것이며, 정성 없어 보이는 휙휙 그린 그림은 천재 화가라고 알려진 피카소의 선 드로잉입니다.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다시 바라봅니다. 어떤 그림을 다시 볼까요? 맞습니다. 피카소의 그림을 다시 보면서, 다른 시점을 찾으려고 애씁니다. 선의 움직임, 간결함 속에 드러나는 말의 모습 등을 찾습니다.

누가 그렸냐에 따라 나의 관점이 바뀐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점을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에 비추어서 생각해보았으면 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만드셨습니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만드셨으니 피카소의 작품에 비할 수 없이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다시금 바라보면서, 왜 훌륭한 작품인지를 긍정적인 모습으로 따져 물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작품임을 잊어버립니다. 우리는 6살 아이가 만든 작품이 절대로 아닙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하느님의 손길을 또 하느님을 바라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 가치가 새롭게 보일 것입니다.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요한 세례자는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구약성경의 마지막 예언자였습니다. 그는 철저히 주님을 준비했고, 그래서 사람들에게 회개의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의 모습을 보고서 어떤 사람은 “미쳤다.”라고도 손가락질했습니다.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광야에 나가서 낙타 가죽옷을 입고 벌꿀과 메뚜기만 먹으면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이 예언자로 믿는 사람은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즈카르야와 엘리사벳의 아들이 요한이라는 이름을 받은 것은 그 이름이 ‘하느님의 은총’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못 낳는 태에 성령께서 생기를 불어넣어 요한이 이 세상에 나올 수 있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은총입니다. 그러나 이를 보고도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있었을 것입니다. ‘늙은 나이에 주책이다.’라고 말하기도 하고, ‘정말로 그들의 아이가 맞을까?’라며 의심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볼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을 볼 수 있는 사람은 한 번 더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의 몫입니다. 섣부른 판단, 특히 부정적인 생각으로는 절대로 하느님의 은총을 볼 수가 없습니다.

어떤 것도 하느님의 은총이 아닌 것이 없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하느님의 은총을 보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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