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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7월 3일 _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20-07-03 조회수 : 352

고대 그리스의 회의론자들이 쓰던 용어 중에 에포케(epoche)라는 말이 있습니다. ‘판단 중지’라는 뜻입니다. 언제나 일관되게 옳고 그른 것도,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없으므로 매사에 성급하게 판단하지 말고 신중하게 판단을 보류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회의론자를 보통 인생무상의 태도나 허무주의를 내세우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어떤 진리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회의론자들의 ‘에포케’라는 단어가 참으로 마음에 듭니다.

사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모습이기도 합니다. 요즘에는 너무나도 많은 성급한 판단이 난무하는 것 같습니다. 물론 빠른 진행을 위해서 빠른 판단이 요구되기는 합니다. 그러나 정확하지 않은 섣부른 판단으로 많은 아픔과 상처를 남에게 남긴다는 점을 떠올리면서 자신의 판단을 멈출 수 있는 ‘에포케’의 상태가 분명히 필요합니다. 그래서 사실 여부를 다시금 살펴보며, 이것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를 한 번 더 생각해야 합니다. 몇 달 전에 몇몇 신부들과 교회의 일에 관해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다들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그런데 한 신부가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판단한다고 해서 결정되지 않잖아. 이런 판단은 멈추고 더 열심히 기도합시다.”

오늘 우리는 성 토마스 사도 축일을 보냅니다. 복음에도 나오듯이, 그는 불신의 상징처럼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습니다. 토마스 사도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단 한 번의 판단이 지금까지도 내려오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강직하고 타협을 모르는 그의 성격, 옳은 것은 옳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줄 아는 성향이었기에 의심하고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그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향해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이 고백은 지금까지도 예수를 설명하는 그리스도교에서는 가장 완벽한 신앙고백 중 하나로 봅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 한 문장만 가지고 밤새도록 기도하기도 했을 정도였습니다.

그의 의심하고 비판적인 시각이 잘못은 아닙니다. 그러나 잠시 멈출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바로 그 순간이 주님을 만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주님을 만나면서 그는 올바른 판단의 길로 나아갈 수 있었으며, 용기 있게 멀리 인도까지 주님의 기쁜 소식을 전하다가 순교의 월계관을 얻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의심하고 비판적인 시각이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판단하고 결론을 내는 모습은 주님을 알아뵙지 못하고 또 함께 할 수 없기에 반드시 피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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