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당신의 길을 가르쳐 주소서”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하늘 나라를 차지하기를 희망합니다. 그 하늘 나라는 이미 우리가 사는 이곳에 있지만, 그것으로 끝나거나 마무리된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더 큰 기쁨으로 성장해 갑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쁨의 성장”은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밭에 묻힌 보물을 얻기 위하여 가진 것을 다 판 사람, 진주를 얻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는 사람, 많은 고기를 잡기 위해 그물질을 하는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하늘 나라의 기쁨을 누리기 위해서는 우리의 노력과 수고가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이 거저 주어진 매일의 삶에 최선을 다합니다. 그럼에도 노력과 수고를 기울이는 모든 사람이 기쁘고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왜일까요? 또, 그리스도를 닮아 ‘희생과 봉사’를 실천하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그리스도인이 행복하고 기쁜 것도 아닙니다. 왜일까요?
그 이유는 참 기쁨의 기준을 하느님이 아닌 ‘나’에게 두기 때문입니다. 즉 하느님이 주시는 ‘보물’과 ‘진주’와 ‘물고기’가 아닌, ‘나의 것’을 선택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솔로몬은 하느님께 “선과 악을 분별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청하였고, 하느님께서는 “분별력”을 청한 그에게 옳은 것을 가려내는 “분별하는 마음”을 주십니다. 장수나 부 또는 원수의 죽음을 청하지 않고 오히려 하느님께서 주시는 ‘옳음을 분별하는 마음’을 청한 솔로몬이 하느님 마음에 든 것입니다. 곧 ‘하느님의 것’을 찾고 분별하는 능력을 청함으로써, 삶의 참 기쁨의 기준을 하느님으로 삼은 것입니다.
참 기쁨의 삶을 위한 기준을 하느님에게 둔 이들의 모습을 바오로 사도는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왜 노력하고, 무엇을 위해 수고하고, 어떻게 봉사하며 희생해야 하는지의 기준이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먼저 분별하는 것이 참 기쁨의 첫걸음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과 초대는 우리를 참 기쁨으로 이끕니다. 그 참 기쁨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먼저 수고와 희생을 통해 삶에 투신하기 전에, 우리는 진정 노력하고자 하는 그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여쭈어야 합니다. 마치 집회서의 저자가 말한 것처럼 말입니다. “모든 일에 앞서 지극히 높으신 분께 기도하여 그분께서 너의 길을 진실하게 인도하시도록 하여라”(집회 37,15). 우리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어 넘치는 기쁨을 얻게 해 주시는 하느님께 우리는 성령으로 가득 차 “주님, 당신의 길을 제게 가르쳐 주소서.”(시편 25,4)라고 먼저 기도하여야 합니다.
기정만 에제키엘 신부(수원가톨릭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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