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 피정 때의 일이 생각납니다. 서품을 앞두고 임했던 피정이어서 더욱더 필사적으로 피정에 집중했습니다. 하루에 7시간 이상을 성당에서 묵상하면서 하느님과 나의 관계를 정립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일주일 정도 지나니 세상일이 궁금해지는 것입니다. 그때가 대통령 선거 직전이라 정치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세상에 특별한 일이 생기지는 않았는지 너무나 궁금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 자리가 불편해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궁금증이 사라지고 편안해질 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일이 내 삶에 득이 되지 않음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지요. 그보다 섣부른 판단을 버리고 온전히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는 일이 제일 중요했습니다.
사회가 복잡하면 그만큼 불편함을 느끼게 됩니다. 특히 잘했다, 잘못했다, 틀렸다 등의 말이 넘치는 세상 안에서 나 역시 여기에 물들어 많은 말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나의 변화인데, 남의 변화만을 이야기합니다. 그만큼 내가 불편해집니다.
이런 이유로 요즘에는 휴대전화를 끌 때가 많습니다. 그래야 세상과의 접촉을 끊고 대신 주님과의 만남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관심을 가질수록 주님과의 관계는 멀어지면서 힘들어지는 것은 언제나 나 자신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인 ‘라자로’가 죽었습니다.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나 지났다는 사실에서 세상의 눈으로는 분명히 죽었다고 단정 지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계셨더라면 라자로가 죽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는 마르타였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의 행동에 대해 비난하지 않습니다. 오빠의 죽음에 큰 아픔을 겪었지만, 예수님께 대한 사랑이 크기 때문에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이렇게 신앙 고백을 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있는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믿습니다.”
이렇게 그녀는 세상의 관점보다는 주님의 관점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습니다. 제1독서의 요한 사도가 말하고 있듯이, 사랑 안에 머무르고 있었던 성녀 마르타는 하느님 안에 머무르고, 하느님께서도 그 사랑 안에 머무르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1요한 4,16 참조).
세상 안에 매여서 사는 삶보다는 주님과 함께 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기준만을 내세우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기준이 내 삶의 바탕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세상의 원칙보다는, 무조건 받아들이는 사랑의 원칙을 따라야 합니다. 그때 주님 안에서 커다란 위로와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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