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전례의 주제는 하느님께서 혹은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은 바로 ‘구원하시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즉 모든 신적인 현시, 나타남의 행위는 사랑과 자비의 행위라는 것이다.
제1독서: 1열왕 19,9a.11-13a: 엘리야에게 나타나신 주님
하느님 야훼께서는 하느님의 산인 호렙산에서 엘리야에게 신비스럽게 나타나신다. 이세벨 왕후의 비호를 받던 바알의 모든 예언자들을 살해하고 왕후로부터 죽음의 위협을 받고 엘리야는 호렙산으로 피하였다. 오랜 도보여행으로 심신이 지친 엘리야는 하느님에 의해 놀랍게 원기를 회복한 후(1열왕 19,5-8) 그는 밤을 지내기 위해 한 동굴에 이르렀다. 그 때 야훼의 말씀을 듣고 동굴 어귀에 나와 섰다(11-13절 참조).
야훼께서는 모세 때와 같이 ‘바위를 부수는’ 크고 강한 바람, 지진, 불길 가운데 나타나시지 않고 다정한 친구처럼, 은밀히 속삭이시며 살랑거리는 바람처럼 말씀하시며 나타나신다. 거의 알아들을 수 없고 빨리 지나가는 그분을 알아 뵙기 위해서는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엘리야는 그분을 알아 뵙고 존경의 표시로 “겉옷 자락으로 얼굴을 가린다.”(13절).
이 하느님은 사랑과 용서의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위대한 사건뿐만 아니라, 거의 무의미하게 보이는 작은 사건 속에서도 현존하심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런 작은 일들을 통하여 충실성을 요구하신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적인 노동, 만남 등을 통해서만이 아니라, 고통과 걱정에서까지도 충실성과 사랑을 요구하시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중대한 기회에만 등장하시는 분이라면 그분은 결코 우리의 ‘친구’가 될 수 없으며, 오히려 ‘방관자’가 되기 쉽다.
복음: 마태 14,22-33: 풍랑에 시달리는 배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권능과 자비를 드러내시는 모습을 보여준다. 인간들에게 친구로 다가오시는 분이지만, 또한 우주의 지배자로서의 권능도 가지신 분이시다. 또한 마태오는 예수님의 물위를 걸으시는 기적을 통하여 예수님을 야훼의 능력으로 자기 백성과 함께홍해를 무사히 건너는 모세의 모습에 비교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빵을 많게 한 기적 후에 즉시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먼저 가라고 명하셨다.
이 기적사화는 두 가지 사실을 보여준다. 즉 예수께서는 밤새 기도하시려 혼자 산에 오르시고(23절) 제자들은 폭풍우 속에서 살려고 애써 노를 젓고 있다. 그 폭풍우는 오직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야 멈추게 된다(32절).즉 인간의 행위는 하느님의 도움을 받지 못한다면 언제나 흔들리고 불안할 것이다. 이제 그분의 현존은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기도하러 가셨다가 사도들을 안정시키기 위해 개입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잘 알아보아야 한다. 이것이 교회론적 차원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어서 베드로는 예수님을 알아 뵙고 자기도 물 위를 걸을 수 있게 해 달라고 한다. 그러나 베드로는 물위를 걷다가 거센 바람을 보고 무서운 생각이 들자 물에 빠지게 되고 예수께서 그를 구해주시며 믿음이 약함을 책하시고 함께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친다. 이때 제자들은 주님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고백한다(28-33절 참조).
이 대목에 교회론적 관점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 베드로는 예수께서 물 위를 걸으시는 것을 보고 열정에 차서 그분을 닮아보려고 자신도 그렇게 해달라고 청한다. “주님, 주님이시거든 저더러 물 위를 걸어오라고 명령하십시오.”(28절). 그러나 처음보다는 신앙이 강하지는 못했다. ‘그러시다면’이라는 가정을 붙이고 있다. 또한 믿음이 있었다고 해도 거센 바람을 보자 그 믿음은 곧 사라져 버렸다. 베드로는 불과 몇 초 안 되는 사이에 최고의 신앙심과 의심으로 인한 극도의 두려움을 체험한다. 이것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제자의 모습은 아니다. “이 믿음이 약한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31절).
우리는 풍랑에 흔들리는 배의 모습에서도, 베드로의 모습에서도 교회에 하나의 본보기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강한 반대를 무릅써야 하는 역사 속에 살고 있다. 그래서 때로는 주님이 계시지 않은 것같이 느껴진다. 그분께 대한 용기 있는 믿음이 요구되지만 믿음이 별로 강하지 못하다. 위기에 부딪치게 되면 즉시 공포에 사로잡히고 만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구원하시기 위해 현존하신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고 그분께 의탁하여야 한다.”(G. Barbaglio, in I Vangeli,Assisi 1975, p. 344).
“용기 있는 믿음과 의탁하는 태도를 가지라.”는 말은 오늘의 교회에도 해당된다. 오늘의 교회는 종교적 윤리적 인간적 문제들을 정면으로 맞대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 심각성 때문에 제자들처럼 폭풍우에 휩쓸려 갈듯 한 두려움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큰 소리로 말씀하신다. “용기를 내어라.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27절).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는 항상 역사 속에서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또한 항상 그분의 사랑과 자비와 권능을 필요로 하고 있다. 필요한 것은 우리의 용기 있는 믿음이다. 이것이 충족될 수 있다면 하느님의 사랑과 권능은 결코 약화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언제나 베드로 사도처럼 확고한 신앙을 갖지 못하고 넘어지고 쓰러질 수 있는 나약한 존재들이며, 그리고 풍랑에 시달리는 배와 같이 교회도 세상의 조류를 거슬러 가며 격랑에 심하게 흔들릴 수 있다. 그러나 항상 주님께서 함께 계시며 구원해 주심을 믿고 기도해야 할 것이다. 마태오 복음사가도 예수님의 영광스러운 계시를 담고 있는 이 가르침을 교회론적으로 바꿈으로써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분께 대한 용기 있는 믿음과 의탁하는 태도를 가지도록 한 것이다. 우리에게 다가오시며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당신의 현존을 체험할 수 있는 삶의 도우심을 청하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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