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이야 반려견 관리에 더 철저해서 목줄을 반드시 채워 산책해야 합니다. 만약 목줄을 하지 않고 풀어 놨다가 사람이 다치기라도 하면 반려견의 주인이 책임을 져야 하지요. 그런데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거의 개를 풀어서 키웠습니다. 그래서 동네에 목줄 없이 돌아다니는 개들이 정말로 많았습니다.
한 번은 학교 갔다가 집으로 오는 길에 돌아다니는 개 한 마리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제게 앞에 있는 개는 너무 크게만 보였지요. 그래서 개를 향해 가까이 오지 말라면서 손을 흔들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 개에게 물리고 말았습니다.
마침 지나가시던 어떤 아저씨가 나서서 개를 쫓아내서 저를 구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울고 있는 제게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개 신경을 건드려서 물린 거야. 가만히 있었으면, 또 무시하고 지나갔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거다. 다행히 크게 물린 것 같지는 않은 것 같으니까 얼른 집에 가라. 괜찮아.”
유혹에 대해 묵상을 하다가 어렸을 때의 이 일이 생각났습니다. 유혹을 대하는 방법과 돌아다니는 개를 대하는 방법이 같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에게는 많은 유혹이 다가옵니다. 그런데 이 유혹이 무섭다고 또 두렵다고 유혹을 건드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유혹은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그냥 지나가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유혹에 관심을 두지 않는 것이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꾸짖습니다. 그 위선이 바로 불행선언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그들은 유혹 그 자체만을 바라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끝이 없는 힘든 의무를 부과했습니다. ‘이것도 하지 마라, 저것도 하지 마라.’고 하면서 죄인으로 살 수밖에 없게 만들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하느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도 ‘사랑’ 때문이지요. 구원의 길로 들어설 수 있도록 지켜야 할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랑이 완전히 빠져 있다 보니,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게 하는 율법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랑이 전혀 없이 율법을 해석하면서 사람들이 진리를 바라볼 수 없도록, 그래서 하늘 나라의 문을 닫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단죄하는 교만함은 유혹만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러나 주님과 이웃에 기준을 두는 사랑의 말과 행동은 함께 살아가는 기쁨의 삶을 우리에게 줍니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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