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에서는 코로나 19로 인한 마이너스 성장에 대한 염려를 쏟아냅니다. 그런데 마이너스 성장이 무조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더 문제가 아닐까 싶습니다. 다른 나라도 이 마이너스 성장을 막기 위해, 바이러스 위협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음에도 봉쇄조치를 풀고 사람들이 예전과 같은 활동을 해야한다고 권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국민의 아픔이 커지는 성장이라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경제의 목표는 온 국민이 편안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게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성장 자체를 목표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의 모든 사람이 마치 성장 자체가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목표인 것처럼 여기는 것 같습니다.
무엇이 더 중요할까요? 순간의 만족만을 바라보고 있기에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주님을 바라보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이 주는 순간의 만족만을 먼저 생각하기에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을 늘 뒤로 미루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순간의 만족을 주시지 않음은 분명합니다. 즉, 순간이 아닌 영원한 만족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지금은 세상의 것이 더 크고 중요해 보이지만, 주님을 따름으로 인해 계속된 행복의 시간 안에 살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불행하여라”라고 하시면서 바리사이들을 향해 메시지를 전해주십니다. 그들은 십일조를 내고 회당 앞자리에 앉으며,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합니다. 이들은 겉으로 보이는 부분만을 신경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사람들에게 참된 의로움과 사랑을 보여 주는 일이나 하느님의 사랑은 소홀히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드러나지 않는 무덤’에 비유하십니다.
민수기 19,16을 보면, 무덤에 닿으면 칠 일간 부정해지기 때문에 회칠하여 표시하도록 명했습니다. 즉, 사람들이 부정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렇다면 회칠하지 않거나, 땅속에 묻혀 있어서 무덤인지를 몰랐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부정해질 수 있습니다.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이 이러했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자기 뜻만을 내세우면서 사람들을 부정하게 만든 것입니다. 바리사이들은 표시하지 않은 드러나지 않는 무덤처럼, 자신의 부패를 은폐시키고 사람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했던 것입니다.
자기 뜻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님의 뜻입니다. 가장 중요한, 주님의 뜻을 놓치지 않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겠습니다. 그래야 다른 이도 올바르게 이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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