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26대 대통령이었던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는 시력이 좋지 않아서 늘 2개의 안경을 들고 다녀야 했다고 합니다. 근시와 원시 안경을 따로 강철 안경집에 담아서 들고 다녔지요. 이를 좋아했을까요? 당연히 싫었을 것입니다. 너무나 무겁고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지금처럼 안경이 가볍지도 않았을 테고, 시력교정 수술 같은 것도 없었으니 그는 늘 불평이 많았을 것입니다.
루스벨트 대통령도 처음에는 이 안경을 너무나 싫어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계기를 통해서 무거운 안경과 강철 안경집을 정말로 애지중지할 정도로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밀워키시에 연설할 때, 한 사내가 그를 향해 총을 쐈습니다. 가슴에 정확히 총을 맞았지요. 하지만 루스벨트는 멀쩡했습니다. 잠시 놀래서 당황스러워했지만, 벌떡 그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강철 안경집에 총알이 맞아 튕겨 나갔기 때문입니다. 평소 불편해했던 강철 안경집이 그를 보호해준 것이었습니다. 그의 생명의 은인이 된 것입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과 시련을 떠올려 보십시오. 어쩌면 이 강철 안경집과 같은 것이 아닐까요? 고통과 시련은 불편하지만, 좀 더 멀리 보면 더 유익했을 때가 더 많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고통과 시련을 무조건 거부하기보다는 그 안에 담긴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나를 진정으로 살리는 ‘강철 안경집’일 수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대단한 역설적인 내용입니다.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도 받아들이기 힘들지요. 그런데 이번에는 더 이해하기 힘든 말씀을 하십니다.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 아내와 자녀, 형제와 자매라 말할 수 있는 가족을 미워할 뿐 아니라, 심지어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라는 것입니다. 원수는 반대로 사랑하라고 하고, 평생 사랑해야 할 자신과 가족은 미워하라는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가 있을까요?
이는 자신과 가족을 사랑해서는 안 되는 뜻이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더 사랑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특히 영원한 생명을 얻는데 자기 자신과 가족이 장애가 된다면 과감하게 미워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라오는 제자가 되라고 명령하십니다.
십자가, 분명히 세상의 관점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 자체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십자가가 앞서 루스벨트의 ‘강철 안경집’처럼 생명을 살리는 역할을 한다는 것입니다.
불굴의 의지와 흔들리지 않는 열성이 있어야 제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주님의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기뻐할 것입니다(필리 2,17-18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