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8일 [연중 제32주일]
오늘 복음을 보면,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으러 가고 있는 우리의 발걸음에 대해 깊이 생각하라고 하고 있다. 사실 죽음이라는 것은 멈춰서는 것이 아니라 ‘빛’의 나라의 ‘문’을 ‘넘어서는 것’이지만,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등불을 밝혀들고 혼인예복을 입어야 한다(마태 22,11-14). 이 때문에 전례주년 마지막 세 주간의 전례는 신자들에게 항구하게 ‘깨어’ 기다리라고 한다.
예수님과 더불어 ‘마지막’ 때가 왔다. 비록 완성되지는 않았지만 이미 ‘종말론’은 시작되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은 필연적으로 ‘종말론적’ 기다림 속에 잠겨있다. “사람의 아들도 너희가 생각지도 않은 때에 올 것이다. 그러니 너희는 늘 준비하고 있어라”(마태 24,44).
복음: 마태 25,1-13: 열 처녀의 비유
오늘 복음의 열 처녀의 비유는 이러한 기다림의 배경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이 비유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자체에 있어야 하는 ‘깨어’ 기다림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이 비유의 내용은 신랑의 집에서 신부의 집으로 신랑을 예우하는 역할을 했던 열 명의 소녀들에 관한 이야기이다(1-4절). 이야기는 아직 준비가 되지 않은 신랑을 기다리다가 잠이 들었던 ‘슬기로운’ 처녀들과 ‘미련한’ 처녀들의 비교이다(6-12절).
‘슬기로움’은 신랑이 늦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예견하고 등불을 계속 켤 수 있는 기름을 따로 준비하고, 그것이 열 처녀 모두에게는 부족한 양이라는 이유로 기름을 나누어주기를 거부하는 것이다(9절). 실제로 이익을 가져다주는 대신에 우리에게나 남에게나 해를 끼치는 행위는 사랑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비유에서는 처녀들 모두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신랑이 늦게 오는 바람에 모든 처녀들은 “졸다가 잠이 들었다”(5절). 그리고 몇몇 처녀들은 결정적인 방심을 한다. 또한 ‘슬기로운’ 처녀들까지도 깨어있지 못한다는 것이다. 처음에 등불을 켜고 신랑을 기다리는 열 처녀의 모습은 초기 교회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열망을 나타내고 있고, 나중의 자는 모습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방심하고 있는 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등잔불 기름은 준비해야 하지만, 곧 당도할 것 같지 않은 신랑 예수 그리스도를 평온한 상태에서 기다리는 상황, 즉 초대 교회 시대에 열화와 같던 기다림의 열망이 누그러져 이천여 년 간 교회가 처해오고 있는 상황을 의미한다. 이는 깨어 기다리는 슬기로운 자세를 잊어도 좋다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 사랑과 믿음을 실천하면서 ‘평온하게’ 주님을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에 우리는 그분이 언제 오시든지 더 기다릴 수 있는 기름이 잘 준비된 ‘등불’을 밝혀 들고 그분을 맞이할 수 있다.
그러기에 이 비유는 우리에게 매일 매일의 현실에 열심히 참여하며 현실 도피적이거나 터무니없는 교설이나 몽상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다. 현재를 충실히 삶으로써 미래를 준비하라는 것이다. 이러한 행동적 삶의 의무에 대해 산상설교의 결론 부분의 내용에서도 나타난다. 거기서도 슬기로움과 미련함을 가늠하는 척도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는 자세’만이 아니라 ‘행하려고 하는 자세’이다.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은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슬기로운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큰물이 밀려오고 또 바람이 불어 들이쳐도 그 집은 반석 위에 세워졌기 때문에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내가 한 말을 듣고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어리석은 사람과 같다. 비가 내려 큰물이 밀려오고 또 바람이 불어 들이치면 그 집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마태 7,24-27).
이 비유에서는 종말론적 전망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즉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우리가 가지고 있는 선한 ‘의도’에 따라서가 아니라 우리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슬기’에 따라 심판하신다는 것이다. 그 ‘슬기’는 하느님께서 원하신 목적이 달성되도록 행동하는 데서 이루어진다. “주님, 주님”만으로는 구원의 은총을 입을 수가 없다.
즉 켜진 등불만으로는 부족하다. 오랜 여정을 위해 충분히 마련된 기름인 사랑의 행위가 필요하다. 행동으로 실천되고 깨어 기다림의 자세로 표현되는 사랑에 관한 주제가 이 비유 전체에 ‘혼인’의 개념을 주축으로 흐르고 있다. 여기에는 ‘신부’의 모습은 나타나지 않지만, 주님을 맞으러 나가는 처녀들이라는 개념 자체에 포함되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예수께서 당신의 돌아오심을 혼인을 배경으로 하는 것은, 당신과의 결정적인 만남이 기쁨과 사랑의 표징 아래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신 것이다.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은 ‘혼인’의 만남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교회는 그리스도이신 ‘신랑’을 더욱 정성스럽게 마음을 다하여 기다려야 한다. 당황하게 된다고 하면 그것은 사랑 때문이어야지 두려움 때문이어서는 안 된다. 하느님 앞에는 두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그분이 두려움을 영원히 몰아내셨기 때문이다(1요한 4,18).
그러므로 “그 날과 그 시간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항상 깨어 있어라”(13절)는 말씀은 위협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 속에 삶으로써 언제라도 당신이 원하실 때, 즉 우리가 그리스도를 뵈올 때, 그분께 합당한 자들이 되라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가 산다면 그분이 ‘한밤중에’ 오시더라도 대낮같이 그분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등불이 환히 켜져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제2독서: 1데살 4,13-18: 부활의 희망과 구원
사도 바오로도 우리를 이러한 평온한 기다림의 자세로 이끌어준다. 테살로니카 신자들은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 모두가 살아있으리라는 희망으로 그분을 고대하였지만(1데살 1,10), 죽어 가는 사람들을 보고 슬픔에 잠겼다.
여기서 바오로 사도는 몇 가지 근본적인 진리를 상기시킨다. 가) 그리스도인은 죽음 앞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다(13절), 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담보이다(14절), 다) 그러므로 이미 죽은 사람들과 살아 있게 될 사람들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으며, 오히려 죽은 사람들이 더 먼저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라고 한다(15-17절). 여기서 ‘살아있는 자들’과 ‘살아남은 자들’(17절; 15절도 참조)의 의미는 그들 모두가 주님께서 ‘영광’ 중에 다시 오실 때 살아있게 되는 자들을 의미한다.
이 대목의 메시지는 ‘위로’(18절)부터의 메시지요, ‘희망’(13절)의 메시지이다. 그 이유는 첫째, 그리스도 신자에게 죽음은 끝이 아니라, 주님과의 결정적인 영광의 만남이기 때문이고, 둘째, 신자들의 공동체는 죽음 뒤에 다시 모여 부활의 기쁨을 영원히 함께 누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즉, “주님과 항상 함께 있기 위하여”(17절)이다. ‘교회’는 이 지상생활을 넘어서도 계속될 것이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이런 말로 위로하십시오.”(18절).
바오로 사도께서도 항상 신비에 싸여있는 그리스도의 재림을 두고 쓸데없는 불안과 지나친 두려움을 제지시키고 있다. 비록 사랑하는 마음으로 깨어있지는 못하더라도 다섯 처녀들처럼 평온한 마음을 잃지 않고 기다리는 것이 ‘슬기로움’이다. 이러한 ‘슬기’를 하느님께 청해야 한다. 그분은 그것을 제1독서가 말하듯이(지혜 6,12-16 참조), 그것을 원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아주 기꺼이 나누어주실 것이다.
항상 깨어 기다림으로 주님께서 언제 우리에게 오시더라도 기쁨 중에 혼인의 만남과 같이 맞아들일 수 있도록 구체적으로 우리의 삶 속에서 결실을 맺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기도하자.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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