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늘 두 가지 가능성을 봐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가 청하는 것을 주시거나, 아니면 그분께서 보시기에 우리에게 더 필요하다고 여기시는 것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첫 번째 가능성, 즉 내가 청하는 것을 주시는 주님만을 믿으려고 하고 또 그렇게 그런 주님만 필요하다고 고백합니다.
주님께서는 기도의 순위를 매기지 않으십니다. “너는 내 마음에 드니까 네 기도의 응답이 일 번이다.”라고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날 수 있도록, 그래서 인간에 대한 사랑이 더 많이 드러나는 응답만 있을 뿐입니다.
“주님께서 어떻게 제게 이러실 수 있어요?”라는 말을 종종 하는 우리입니다. 자신에게 너무나 가혹한 주님이고, 너무나 불공평한 주님이라는 것이지요.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나만의 생각이고 판단에서 나온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지요.
“겉모습을 보고 판단하지 말고 올바로 판단하여라.”(요한 7,24)
올바로 판단한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앞에 말씀드린 두 가지 가능성 모두를 믿는 판단입니다. 다시 말해, 믿음 안에서 이루어지는 판단이 필요합니다.
어린 자녀가 날카로운 칼을 달라고 아버지에게 조르면 어떻게 할까요? ‘사랑하는 내 자녀니까 칼을 줘야지.’라면서 날카로운 부엌 식칼을 손에 쥐여주는 아버지는 없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게 독이 될 칼을 절대로 주시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의 ‘과부의 헌금’ 이야기는 아주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 시대를 떠올려 보면 과부라는 신분 자체의 어려움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여성의 지위가 거의 없었던 시대였고, 더군다나 자신을 보호할 남편도 없는 상태에서 이 과부는 가난함에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이 가지고 있던 생활비를 다 예물로 넣습니다.
그에 반해서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은 분명히 이 과부보다 많은 돈을 예물로 넣었습니다. 사람들은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많은 예물을 봉헌했으니 하느님으로부터 더 많은 은총을 받을 수 있을거야.’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이들이 남아도는 것에서 조금 내놓았을 뿐이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사람의 판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판단을 바라볼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남아도는 것을 조금 내놓는 것만으로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없으며, 가난해서 가난한 이를 도와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은총 받을 자격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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