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의 인과관계를 선명하게 규명하려는 집착 속에 사는 우리는 아닐까요?
어떤 분이 교통사고로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하게 되었습니다. 자유를 잃어버리고 답답한 병원에서 생활하는 것이 점차 짜증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러면서 자기 불행의 원인을 계속해서 찾습니다. 교통사고의 가해자가 원인이 되었다가, 갑자기 불러서 그 자리를 지나도록 한 친구가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또 사고의 위험이 많은 환경을 제공한 도로의 책임자인 시 당국이 원인이 될 때도 있습니다. 사고 났을 때, 어떤 조치도 취하지 않고 모른 척 지나갔던 사람들 역시 불행의 원인으로 생각되었습니다.
이런 식으로 원인을 찾다 보면 무엇이 달라질까요? 원인을 찾았으니 이제는 행복해질 수 있을까요? 솔직히 이런 집착에는 아무런 요점도 또 의미도 없습니다. 또다른 고통만을 내게 가져다줄 뿐입니다. 그런데도 계속해서 인과관계를 만들어 자신을 세상에서 제일 불쌍한 피해자로 만듭니다. 행복의 주인공이 아닌, 불행의 주인공으로 자신을 몰아가는 것입니다.
불행의 인과관계가 아닌, 행복의 인과관계를 만들어야 합니다. 내가 행복한 원인을 찾다 보면 행복한 점들이 내 곁에 무궁하게 많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감사할 일도 많아집니다. 모든 고통과 시련을 거뜬히 이겨낼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종말에 관해 말씀하시며 중간에 박해에 관한 말씀을 하십니다. 당신께서 곧 배신당하실 것처럼, 장차 성전이 무너지기 전에 그들도 배신을 당하리라고 제자들에게 경고하십니다. 하지만 경고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 박해를 참고 견디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는 선포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이 끝까지 참고 견디려면 미리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죽음에 대해 말씀하시고서는 곧바로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라며 그들을 위로하시지요. 왜 이 말씀으로 위로를 얻을 수 있을까요? 모든 육신이 부활하는 날에 온전한 몸으로 되살아나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욱더 끝까지 참고 견디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가장 먼저는 앞서 말씀드린 불행의 인과관계를 찾는 것이 아니라, 행복의 인과관계를 찾는 것입니다. 고통과 시련의 원인이 무궁무진한 것처럼, 우리 행복의 원인도 무궁무진합니다. 그래야 어떤 박해가 찾아와도 기쁨 안에서 이겨낼 수 있으며, 동시에 육신의 부활이라는 영원한 생명을 희망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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