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종 손익계산이 빠른 사람을 봅니다. 계산이 빨라서 손해를 볼 것 같으면 절대로 행동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이 시장의 상인이라면 ‘당연히 그래야지.’라고 말할 것입니다. 그런데 신부나 수녀가 손익계산에 빠르다면 어떨까요? 아마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요?
“신부, 수녀가 뭐 저래?”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은 “계산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세상의 논리로 계산하지 않고, 주님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위해 아흔아홉 마리를 들판에 버려둔 채 산속을 헤매는 목동 이야기를 기억해보십시오. 계산하지 않는 모습이 아닙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당신 몸으로 직접 모범을 보여주셨습니다. 바로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아무런 죄가 없으신 하느님께서 세상의 죄인들 앞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습니다. 당신의 전지전능한 힘으로 곧바로 벌을 내리실 수도 있었지만, 우리 구원을 위해 당신 몸으로 직접 속죄양이 되셨습니다.
하느님 편에 서기로 한 사람은 세상과 분리되는 삶, 대신 하느님과 일치할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사랑’만을 바라볼 수 있다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판단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율법학자들은 사람의 아들이 오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그 말이 맞다고 하시면서, 엘리야가 이미 왔음을 확실하게 전해줍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제멋대로 다루었다고 하지요.
누구를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로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세례자 요한은 엘리야 예언자가 환생한 것일까요? 아닙니다. 세례자 요한을 엘리야 예언자로 부르는 것은 그가 엘리야라서가 아니라 엘리야의 일을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일, 주님의 길을 환하게 닦아놓았기 때문입니다.
지금을 사는 우리 역시 하느님의 일을 하는 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알면서도 세상 것에 대한 욕심과 이기심으로 인해서 하느님의 일이 늘 뒤처집니다. 나의 일만 할 뿐입니다.
엘리야의 일을 함으로써 주님으로부터 인정받은 세례자 요한처럼, 우리도 주님께 인정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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