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제이자 신학자인 헨리 나우웬 신부님의 책을 읽다가 이런 구절을 보았습니다.
“당신 내면에 있는 어떤 것이 죽어가고 있으며 또 어떤 것이 새로 태어나고 있음은 명백하다. 당신은 주의를 집중하고 차분한 상태도 당신이 가진 최고의 직관에 복종해야 한다.”
이 구절을 몇 번이나 반복해서 읽었는지 모릅니다. 이해가 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마음을 꽝 때리는 큰 깨달음을 주는 글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렵고 힘든 순간이 찾아오면 어떻습니까? 죽을 만큼 아프고, 죽음 외에는 아무런 길도 없어 보이기도 합니다. 그 순간이 바로 내 안에 어떤 것이 죽어가고 있을 때였습니다.
그런데 이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바로 그 순간 내 안에 어떤 것이 새롭게 태어납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이 내 안에서도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깊이 내 안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즉, 부활이라는 희망을 봐야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바라보는 사람만이 새로운 삶을 살게 됩니다.
이것이 주님의 뜻이고, 그분 뜻에 복종하며 사는 것입니다. 죽음으로 끝나는 의미 없는 삶이 아닌 그 너머에 있는 부활의 의미를 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희망 아닌 죽음의 단계에서 갇혀서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당시의 교회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찾아와서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고 있냐면서 묻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답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질문 하나를 던지시지요. 즉, 세례자 요한의 세례에 관한 질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르겠소.”라고 대답합니다. 자신들의 답변으로 인해서 사람들의 반대를 받을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솔직하지 않은 사람에게 주님께서 진리를 굳이 말해 줄 필요가 없었지요. 그래서 “나도 무슨 권한으로 이런 일을 하는지 너희에게 말하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모르겠다고 해서 “나도 모른다”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진리를 들을 자격이 없었던 것입니다.
당시 교회 지도자들은 희망을 보지 못했습니다. 하느님을 보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세상의 틀 안에 갇혀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들은 죽음의 틀에 갇혀서 부정적인 생각만을 하게 됩니다. 이런 모습이 주님의 진리를 들을 수 있는 자격을 얻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의 우리는 어떤가요? 희망의 주님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거짓을 버리고 솔직하게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진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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