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신혼부부가 부부싸움을 엄청나게 했다고 합니다. 이 싸움의 원인은 아침밥이었습니다. 오랫동안 혼자 자취를 하며 살아왔던 남편은 결혼과 동시에 아내가 해 주는 따뜻한 밥을 먹으며 출근하는 것이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지 못하니까 아침은 알아서 해결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남편은 직장 생활을 하지 않고 가사만 담당하는 아내가 당연히 아침을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아내는 어떻게 당연한 것이 있냐면서 그 무엇도 강요하면 수평적인 부부관계를 가질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었습니다.
아침밥 문제가 결국 이혼 이야기까지 도달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아침밥’만의 문제일까요? ‘당연히 ~해야만 한다’라는 식의 당위적 요구와 기대 때문입니다.
남편은 아침밥을 아내가 해줘야 한다는 당위적 기대를, 아내는 서로에게 강요하지 않는 수평적 부부관계에 대해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 서로 다른 기대가 충돌을 일으킨 것입니다.
사실 ‘당연히 ~해야만 한다’라는 것은 없습니다. 그럴 수도 있는 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서로를 이해하지도 또 받아들이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을 주님을 향한 우리의 모습에서도 그대로 드러납니다. 주님께서 당연히 나의 기도를 들어주셔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안 좋은 결말을 가져올 뿐입니다.
주님과 나의 관계,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당연히 ~해야만 한다’라는 당위적 요구와 기대를 없애야지만 함께 잘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를 없애는 유일한 방법이 바로 ‘겸손’입니다.
이 겸손을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세례자 요한을 통해서 배웁니다. 그는 대사제의 아들로 좋은 가문 출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의 물음에 ‘그리스도’라고 대답했다면 세상의 부귀영화를 다 누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후에 비참하면서도 어이없는 죽임을 당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겸손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라고 말하면서, 그리스도가 아님을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겸손하지 않으면 하느님을 알아볼 수 없습니다. 자기만을 드러내다 보면 하느님을 보려는 마음 자체가 사라지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겸손했기에 하느님을 알아볼 수 있었고, 끝까지 하느님을 증거하는데 자신의 모든 것을 봉헌할 수 있었습니다.
이 겸손을 우리 안에 간직해야 합니다. 이것이 요한 사도의 말씀처럼 주님 안에 머무르는 것입니다(1요한 2,27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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