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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1월 4일 _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1-01-04 조회수 : 1964

언젠가 어떤 청년이 면담을 청해서 만났는데, 만나자마자 울음을 터뜨립니다. 잠시 진정할 시간을 주면서 기다리자 불쑥 이런 말을 내뱉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정말로 너무 하셔요.”


지금의 어려움을 이야기합니다. 오랫동안 어떤 시험을 준비해서 봤는데, 늘 1차에는 여유 있게 합격하지만 2차에서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최선을 다해 노력했는데, 왜 이렇게 불합격만을 주시는지 모르겠다는 말이었습니다.


몇 차례의 실패가 이 청년을 낙담의 굴레에 빠지게 했습니다. 이 상황에 있는 청년에게 어떤 말을 해야 힘이 될지 난감했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 청년이 말했던 “최선을 다했다”라는 말이 생각나는 것입니다. 시험에 응시했던 다른 청년들도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까요? 이런 상황에서 하느님께서는 누구의 바람을 들어주셔야 할까요?


실패를 맛보게 되었을 때 우리는 “최선을 다했는데….”라는 아쉬움을 표현하곤 합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 태백산맥을 쓴 조정래 작가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최선을 다했다는 말, 함부로 쓰지 마라. ‘최선’이라는 말은 나 자신의 노력이 나를 감동하게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쓸 수 있는 말이다.”


최선을 다했다는 말보다 나를 감동하게 할 수 있는 행동이 먼저 아닐까요? 나 자신을 먼저 감동하게 한다면 ‘운이 없고’, ‘환경이 나빠서’, ‘최선을 다했다’는 등의 의미 없는 말을 하지 않게 됩니다. 우선 우리의 말과 행동은 달라집니다. 그때가 바로 주님을 만나는 순간이 됩니다.


예수님의 손길을 받은 사람이 누구였는지 복음은 제시하고 있습니다. 갖가지 질병과 고통에 시달리는 환자들, 마귀 들린 이들, 간질 병자들과 중풍 병자들이었습니다. 백성 가운데에서도 병자와 허약한 사람들뿐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세상 사람들의 외면을 받는 사람이었지요. 당시에 이런 고통은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기에 손가락질을 받으며 힘든 시간을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힘도 전혀 없어서 누군가가 자신을 데려다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런 밑바닥의 상황에서 비로소 그들은 주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고통과 시련 속에서 조금의 희망도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지만, 주님을 통해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관점으로 최선을 다했다는 말을 써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보다 주님 앞에 나아가는 데 더욱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 안에서 삶을 제대로 살 수 있는 희망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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