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 공현 대축일 후 수요일]
요한 1서 4,11-18
마르코 6,45-52
기도는 하느님의 개입을 바라는 간청이 아니라
고요한 내적 공간에 들어가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몸담고 살아가는 이 시대를 일컬어 사람들은 ‘불안의 시대’라고 합니다.
특히 팬데믹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오늘 우리들이 느끼는 불안과 두려움의 종류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저만 해도 요즘 각양각색의 다양한 유형의 두려움을 안고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병고에 대한 두려움, 노화에 대한 두려움, 전쟁에 대한 두려움, 또 다른 바이러스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두려움, 수도자로서 관구의 미래에 대한 두려움, 언젠가 장애나 치매가 와서 후배들에게 민폐를 끼치면 어떡하나 하는 두려움, 그리고 탈모에 대한 두려움 ㅋㅋㅋ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이 한 가지 있습니다. 찢어질듯이 가난할 때, 첨단 문명과 거리가 멀던 시절에는 걱정이나 불안이 그렇게 많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소유가 많아지고 최첨단 과학 문명이 발달하면 할수록 걱정과 불안이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지속적인 불안 증세는 우울증이나 정신 질환으로 발전되니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그런데 전문가들은 이런 견해를 펼칩니다.
인생에 있어서 적당한 불안감, 적당한 두려움은 필수 요소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정신 건강에 좋다는 것입니다.
또 이 세상에서 두려움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존재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미 세상을 떠난 사람들 외에는. 다시 말해서 두려움에 대한 완벽한 해결책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두려움에 짓눌려 허덕이며 살아가는 오늘 우리에게 요한 사도는 이렇게 외칩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요한 1서 4장 18절)
사랑의 사도 요한의 사랑에 대한 가르침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주님으로부터 흘러넘치는 사랑을 충만히 받았고, 사랑이란 단어를 평생에 걸친 삶의 모토로 삼았던
요한의 생애 결론이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 였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우리 인간을 향한 사랑은 적당한 사랑, 인간적 사랑, 통속적인 사랑을 넘어서는, 완전히 차별화되는 완전한 사랑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를 향한 예수님의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저 우리가 행복하고, 우리가 치유되고, 우리가 구원되기만을 바라시는 그분의 사랑이었기에, 우리를 위해 목숨바치는 것조차 두려워하지 않으셨습니다.
자녀들을 극진히 사랑하는 부모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한번 보십시오.
마찬가지로 두려움이 없습니다. 할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합니다.
그 결과 불가능을 가능하게도 만듭니다.
참된 사랑의 소유자는 아무리 큰 장애물이라 할지라도 뛰어넘습니다.
그 어떤 곤경속에서도 견뎌내고 이겨냅니다. 사랑의 위대한 힘입니다.
우리 시대의 대영성가 안셀름 그륀 신부는 밀려오는 불안과 두려움 앞에서 기도가 정답이라면서,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집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시라고 기도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 문제와 불안과 걱정에 대해 하느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내 딱한 처지와 무기력을 그분께 내맡깁니다.
부정적인 감정을 하느님 앞에서 인정함으로써 나 자신이 변화됩니다.
우선 나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님을 느낍니다.”
“나는 기도하면서 성령의 내적 샘과 만나 위기에 다르게 대처하는 힘을 얻습니다.
기도는 하느님의 개입을 바라는 간청이 아니라 고요한 내적 공간에 들어가는 일입니다.
거기서 하느님께서 사시고 거기서 성령의 샘이 흘러 나옵니다.
이 고요한 내적 공간에서 나는 안식과 평화를 누리고 나 자신을 만납니다.”
“내가 고요 가운데 참 자아를 만난다면, 다시 말해 이웃의 판단, 내 강점이나 약점, 건강과 질병 등에 구애받지 않는 참 자아를 만난다면 외적 일들은 더 이상 나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위기는 선물이다’, 안셀름 그륀, 바오로딸 참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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