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이라는 말을 참 많이 하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그 기준에는 ‘나’라는 이기적인 사랑이 있는 것은 아닐까요? ‘나’라는 기준에 맞춰서 사랑을 말하고 판단하고 가르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아내가 남편에 대한 말을 늘어놓습니다. 사랑하지만 남편의 잘못된 모습에 실망도 많이 하고 화도 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계속 싸운답니다. 이번에는 남편과 대화를 나눠보았습니다. 남편 역시 아내를 사랑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왜 자신에게 화를 내는지 도대체 이해가 안 된다고 합니다. 별로 심각한 것도 아닌 것을 갖고 자기를 달달 볶는다면서 지금의 상황이 너무 힘들다고 이야기합니다. 과연 누구에게 문제가 있는 것일까요? 어느 책에서 이렇게 선언하는 구절을 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가르친다는 개념은 건방지고 부족하고 몹시 해롭다.”
성인으로 만나서 함께 살면서 계속 가르치려 들면 사랑이 없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렸을 때 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간섭에서 벗어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시 어렸을 때의 간섭을 성인이 되어 받으면 어떨까요? 도망가고 싶을 것입니다.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변화하기를 바란다고 말하지 않게 됩니다. 진실한 사랑은 상대의 존재를 온전히 수용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반대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하느님의 기준과 예수님의 모습에서는 커다란 차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스테파노 성인께서 순교하실 때 그 자리를 지키면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박해했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체험하면서 극적으로 회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방인들도 예수님을 믿고 따를 수 있도록 열정적으로 사셨습니다.
예수님을 박해하던 사람이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라는 예수님 말씀을 철저하게 따르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가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자기만 생각하는 사랑이 아니라, 주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진짜 사랑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지금을 사는 우리가 편안히 주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면서 진짜 기쁨의 삶을 살게 되었습니다. 우리도 주님의 사랑을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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