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산(辛酸)하고 을씨년스런 삶, 씁쓸하고 고독한 삶, 그래서 오직 주님에게로만 초점이 맞춰지는 삶!
참혹하고 을씨년스러웠지만 장엄하고 당당했던 세례자 요한의 일몰을 묵상합니다. 안타깝게도 그는 사악한 복수의 화신 헤로디아의 희생양이 됩니다. 한때 그리도 각광받던 그였는데, 어둡고 깊은 지하 감옥에 갇힙니다.
그것도 모자라 세례자 요한은 헤로데의 생일날 노리갯감으로 전락합니다. 정말이지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집니다. 그의 목은 잘려져 쟁반 위에 담겨집니다. 쟁반 위에 담겨진 그의 머리는 헤로디아 앞으로 배달됩니다. 그의 머리를 보고 깔깔대며 희희낙락했을 헤로디아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의인 중에 의인이었던 세례자 요한의 이 끔찍하고 고통스런 최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할 정도입니다. 그의 억울한 죽음은 어쩌면 곧 뒤따라올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의 예표입니다. 예수님의 선구자이자 예언자였던 세례자 요한의 죽음 안에는 더 억울하고 더 천부당만부당한 예수님의 죽음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세례자 요한의 억울한 죽음은 오늘 우리 가운데서도 계속됩니다. 아무런 죄도 없는 의인들이 이 세상에서 받고 있는 박해와 십자가 길, 그리고 억울한 죽음!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무죄한 이들과 선인(善人)들의 고통과 시련은 또 어떻습니까?
주변을 둘러보면 참으로 이해가지 않는 측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악이란 악은 다 저지르며 살아가는 사람들! 떵떵거리며 잘 먹고 잘 살아가고 있습니다.
반면에 잘못한 것이라곤 손톱만큼도 없는 사람들, 법 없이도 살 착한 사람들, 이웃의 고통을 차마 외면하지 못하고 발 벗고 나선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겪는 고초가 참혹할 정도입니다. 이토록 공정하지 못한 현실을 신앙인으로서 대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입니까?
세례자 요한의 삶과 죽음은 또 어떻습니까? 그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처럼 구약시대를 종결짓는 마지막 예언자이자 예언자중의 예언자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은 마지막 대예언자의 죽음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초라하고 덧없는 죽음입니다.
참으로 억울하고 이해할 수 없는 죽음입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그것이 예언자로서의 삶과 죽음의 본모습인 듯합니다. 쓸쓸하고 아쉽고 드러나지 않는 삶과 죽음, 자신이 아니라 자기 뒤에 오시는 주인공이신 주님을 빛내게 해주는 존재로서의 삶과 죽음이 곧 예언자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무척이나 신산하고 을씨년스런 삶, 씁쓸하고 고독한 현실, 그래서 오직 주님에게로만 초점이 맞춰지는 삶 그것이 참 예언자로서의 삶이 분명합니다.
예언자들이 대단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하느님으로부터 등을 돌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부여된 예언자로서의 길을 묵묵히 걸어갔습니다. 너무나 괴로울 때는 있는 그대로 하느님께 하소연했습니다. 항상 하느님과 소통하며 그분의 뜻을 찾았습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 또 다른 예언자들인 사제들과 수도자들, 선구자들을 바라봅니다. 그들이 보다 가난해지도록 그들이 좀 더 고독해지도록 도와줘야겠습니다. 그들이 갖출 것 안 갖출 것 다 갖추고 떵떵거리며 산다면, 그것처럼 예언자로서 부끄럽고 비참한 삶이 다시 또 없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 예언자로 산다는 것,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것은 어쩌면 박해받는 의인으로서의 삶을 선택한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느님의 메시지를 가감 없이 전달하는 일, 사회 정의와 인권의 소중함을 외치는 일, 남들이 마다하는 선행과 봉사를 실천하는 일, 세상 사람들 눈으로 볼 때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일, 손해 보는듯한 느낌이 드는 일, 그 일을 하고 계신다면 제대로 된 예언자의 삶을 사는 것이 분명합니다.
오랜 역사 안에서 언제나 그랬듯이 참 신앙인의 길은 세상의 논리와 이치를 뛰어넘습니다. 나와 내 가족의 울타리를 벗어납니다. 결국 바보처럼 살게 합니다. 손해 보는 삶을 선택하게 만듭니다. 그것이 결국 주님께서 원하시는 예언자의 길이요 의인의 길입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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