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은 하느님을 더 자주 생각하고 더 인격적 관계를 맺으라고 초대하는 부르심입니다!
언젠가 한 대 영성가께서 끔찍한 호러 영화를 보시는 모습에서 큰 충격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유혈이 낭자하는 조폭 영화나 보기만 봐도 끔찍한 공포 영화는 아예 보지 않는 편입니다.
영화를 보더라도 마음 편안해지는 가족 영화나 멜로 영화를 즐겨보는 편입니다.
클래식이나, 내 마음 속의 풍금이나, 8월의 크리스마스 등등. 그러고 보니 마음 편히 영화 한편 본지도 정말 오래 되었습니다.
뉴스를 보다가도 끔찍한 뉴스가 나오면 고개를 돌리게 됩니다.
그런데 요즘 너무 자주 고개를 돌리게 되는 화면이 잦다보니, 아예 뉴스조차 보기가 두려워집니다.
불행이 밀려오기 시작하면 한꺼번에 밀려온다더니, 코로나19 바이러스 여파로 갑작스레 사라진 직장,
그에 따른 생활고, 우울증세, 극단적 선택...힘겹게 하루 하루를 버티다가 더 이상 살아갈 이유나 희망, 동력을 상실한 이웃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이럴 때 일수록 우리 사회의 안전망이 더 활발히 발휘되어야 하겠습니다.
동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내 발밑만 바라보지 말고 시야를 좀 더 넓혀야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 누군가가 소리 없이 죽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눈을 부릅뜨고 살펴봐야겠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래서는 안 된다고, 함께 가자고, 힘을 보태 이 어려움을 이겨내자고 외쳐야겠습니다.
일말의 위로가 되는 것은 위대한 신앙의 선조들 역시 다들 원치 않은 십자가 길을 묵묵히 걸어갔다는 것입니다.
조금도 호의적이지 않은 삶과 매일 마주하며 비틀비틀 신앙의 여정을 걸어갔다는 것입니다.
특히 욥이라는 특별한 인물의 삶은 이해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신음하는 우리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지 모릅니다.
그의 인생은 정말이지 끔찍한 고통의 연속이었습니다.
“하느님이 계시다면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하는 탄식과 한숨이 절로 나오는 인생이었습니다.
사는 게 얼마나 괴로웠으면 이런 탄식을 남겼습니다.
“인생은 땅 위에서 고역이요 그 나날은 날품팔이의 나날과 같지 않은가?
그늘을 애타게 바라는 종, 삯을 고대하는 품팔이꾼과 같지 않은가?
그렇게 나도 허망한 달들을 물려받고 고통의 밤들을 나누어 받았네.
누우면 ‘언제나 일어나려나?’ 생각하지만 저녁은 깊어 가고 새벽까지 뒤척거리기만 한다네.
나의 나날은 베틀의 북보다 빠르게 희망도 없이 사라져 가는구려.
기억해 주십시오, 제 목숨이 한낱 입김일 뿐임을.”(욥기 7장 1~4절, 6~7절)
사실 욥은 한때 아주 잘나가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는 하느님으로부터 극찬을 들은 보기 드믄 참 신앙인이었습니다.
“너는 나의 종 욥을 눈여겨보았느냐?
그와 같이 흠 없고 올곧으며 하느님을 경외하고, 악을 멀리하는 사람은 땅 위에 다시 없다.”(욥기 1장 8절)
이토록 하느님 사랑을 한 몸에 받던 욥이었는데, ‘재미있는 하느님’ ‘때로 이해 못할 하느님’께서
잘 나가던 욥을 크게 내리치십니다.
그를 심연의 구렁텅이로 떨어트리며 시험에 빠지게 하십니다.
그것도 적당히 내리치시는 것이 아니라 완전히 풍비박산이 나게 만드십니다.
그 많던 재산 모두를 약탈당하게 만드셨습니다.
그 많던 종들과 가축들이 모두 죽어나갔습니다.
결국 사랑하는 자녀들마저 모두 비참하게 죽고 맙니다. 뿐만 아닙니다.
악성 피부병에 걸린 욥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재를 온 몸에 둘러쓰고 사기그릇 조각으로 가려운 부위를 긁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어이없는 인생이 되고 만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눈여겨볼 욥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하느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자신 앞에 펼쳐지는 정말 이해하지 못할 억울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수용합니다.
하느님 앞에 완전히 벌거벗은 알몸으로 엎드려 외칩니다.
“알몸으로 어머니 배에서 나온 이 몸, 알몸으로 그리 돌아가리라.
주님께서 주셨다가 주님께서 가져가시니, 주님의 이름은 찬미 받으소서.”
참으로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토록 큰 불행 앞에서도 악담이나 저주, 투덜거림이 아니라 하느님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도 주님 앞에 완전히 알몸으로 설 때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난다 긴다 하지만 어느새 우리도 강렬한 밑바닥 체험을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잔뜩 이렇게 저렇게 치장을 하고 있지만 언젠가 우리의 부끄러운 민낯을 하느님 앞에 드러낼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는 욥의 한결같은 신앙을 떠올려야겠습니다.
하느님을 향해 언제나 활짝 자신을 열어놓는 개방성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지금부터라도 작아지는 연습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높은 곳에 있을수록 밑으로 떨어질 때 그 충격이 큽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낮은 곳으로 내려가는 노력을 되풀이해야겠습니다.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심연의 밑바닥 거기까지 내려가면 거기서 광대무변한 하느님의 얼굴을 뵐 수 있을 것입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낮아지고 작아지는 것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욥은 나름대로의 결론에 도달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피조물에 불과한 한 인간이 그분의 의지, 그분의 처신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그 자체가 천부당만부당한 행위라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금 내가 겪고 있는 고통과 상관없이 나를 사랑하시고 축복하신다는 결론에 도달합니다.
욥은 자신에게 다가온 참혹한 시련 앞에서, 하느님을 원망하기도 하고 부정하기도 하지만, 결국 그 시련을 통해 하느님을 더 깊이 생각하게 되고, 그분의 현존을 더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결국 광대무변하신 하느님 앞에 자신은 한낱 티끌 같은 피조물에 불과함을 깨닫습니다.
결국 자신의 인생사 모든 것, 성공도 실패도, 재산도 가족들도, 병고도 죽음도 그분 손길 안에 의탁해야 함을 알게 됩니다.
따라서 큰 시련이 다가올 때 우리는 더 자주 하느님을 찾아야겠습니다.
더 자주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추구 해야겠습니다.
더 그분께 집중해야겠습니다.
또한 갑작스레 우리에게 다가오는 참혹한 고통은 우리가 지은 죄에 대한 하느님 측의, 징벌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시련은 하느님을 더 자주 생각하고 더 인격적 관계를 맺으라고 초대하는 부르심, 더 성장하고 더 큰 그릇이 되라는 부르심임을 잊지 말아야겠습니다.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