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때는 말이야~”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신이 살았던 과거의 시간을 회상하면서 그때가 좋았다면서 말합니다. 그런데 정말 그때로 되돌아가면 좋을까요?
언젠가 우리나라의 7~80년대를 연상하게 만드는 개발 도상국으로 여행을 간 적이 있습니다. 버스를 탔는데 바닥에 구멍이 나서 바닥에서 흙먼지가 실내로 풀풀 날립니다. 버스 안에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보였습니다. 공중화장실은 너무나 지저분해서 들어가서 일을 보기에는 엄청난 인내심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묵고 있는 호텔에서만 인터넷이 가능했고, 그나마 거의 접속이 되지 않았습니다.
사실 이 나라에 와서 하루 이틀은 너무나 좋았습니다. 어렸을 때를 떠올리면서 ‘우리도 이랬던 적이 있었는데….’라는 생각을 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불편함이 가득했습니다. 훨씬 더 발전된 우리나라에 빨리 가고 싶었습니다.
“나 때는 말이야.”라고 말할 때, 그 ‘나 때’가 과연 좋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저 어렵고 힘든 시기를 살았었다는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하는 말일 뿐입니다.
물론 ‘나 때’가 좋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 좋을 때는 바로 지금입니다. 그 지금이 가장 좋은 때임을 그리고 가장 의미 있는 시간임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과거에 매여서 사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바라보면서 지금을 살아야 합니다.
바르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라고 묻습니다. 자신들은 자기 조상들의 전통을 잘 지키고 있으며, 이것이 율법을 잘 보존하는 것으로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모세 율법에 어긋나는 것이었습니다. 모세 율법 역시 ‘사랑’이 가장 윗자리에 있습니다. 이 사랑을 외면한 모든 전통은 그 자체로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과거에 매여서 살면서, ‘바리사이법’이라고 불리는 그들만의 법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어떤 것은 빼 버리고 어떤 것은 덧붙이면서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해석했던 것입니다. 그 결과를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을 지키는 것이다.”
사람의 전통만을 지키다 보니 ‘사랑’이 제외되어 있어도 상관이 없었습니다. 사랑을 다해 부모를 공경하지도 않으면서, ‘제가 드릴 공양은 코르반, 곧 하느님께 바치는 예물입니다.’라는 말만 하면 제대로 공경하는 것이라는 착각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우리도 과거의 잘못된 전통에 매여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보다 하느님 나라라는 미래를 바라보면서 사랑하면서 지금을 성실하게 살아야 합니다.
적절한 거리
저는 개 몇 마리를 키우고 있습니다. 이 개들이 얼마나 예쁜지 모릅니다. 특히 겨울이 되면 세 마리가 꽉 붙어서 서로의 온기를 나눠주는 모습을 보면 너무나 사랑스럽습니다.
개의 부드러운 털에 의해서 서로 붙어있으면 정말로 따뜻합니다. 문득 고슴도치는 어떨까 싶었습니다. 고슴도치의 날카로운 가시 때문에 서로 가까이 다가가기 힘들지 않을까 싶었지요.
이들은 추위를 느끼면 서로 가까이 다가간다고 합니다. 하지만 이내 가시에 찔려 아픔을 피하려 다시금 서로 떨어집니다. 이렇게 고슴도치는 추위와 아픔 사이를 왕복하다가 마침내 서로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게 됩니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면서도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절묘한 거리를 찾아서 유지하게 됩니다.
인간관계 안에서도 적절한 거리가 필요합니다. 너무 가까이도 또 너무 멀리 떨어져도 안 됩니다. 너무 가까우면 집착에 빠질 수가 있고, 너무 멀리 떨어지면 무관심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거리를 어떻게 맞출 수가 있을까요? 이를 위해 더 많이 만나야 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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