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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3월 2일 _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1-03-02 조회수 : 2878

가르치는 사람은 가르침을 받는 사람보다 열배 백배 더 겸손해야합니다!


항간에 떠도는 우스갯 소리가 제 가슴을 철렁하게 만듭니다. 주일 미사 다녀오면 웬지 손해보는 느낌이랍니다. 강론 시간, 라떼형 신부님께서는 한 주간 동안 당신 힘드셨던 일들 원없이 하소연하시고, 당신 하고 싶은 이야기들, 자화자찬 실컷 늘어놓으시면서 스트레스 제대로 푸신답니다.


그런데 신자석에 앉은 우리는 꼼짝없이 그 모든 말씀 다 들어 드리고, 헌금까지 해야하니 너무 억울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속이 후련해지신 신부님으로부터 만원을 받아야 되는 것 아니냐는 것입니다.


강론의 중요성과 어려움에 대해서 다시 한번 실감합니다. 저 역시 오랜 세월 강론을 해왔지만, 강론대에 설때 마다 늘 큰 부담감과 두려움을 안고 서게 됩니다. 사목자로서 눈코뜰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다보면, 어느새 하루가 가고, 미사는 어김없이 드려야 하고...


언젠가 유럽 한 교구에서는 강론이 얼마나 괴로웠던지 신자들을 중심으로 ‘강론 없애기 운동’을 펼쳤던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한 칼럼니스트는 ‘강론을 폐지하자.’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현대인들이 견뎌내야만 하는 여러 가지 일 들 가운데 가장 괴로운 일은 강론을 듣는 것이다.”며 자신의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았습니다.


특히 요즘 세상, 참으로 강론하기 힘든 세상입니다. 사람들의 넋을 ‘쏙’ 빼놓고 마는 갖은 첨단 매체들, 눈길을 ‘확’ 끌어당기는 다양한 볼거리와 놀 거리로 넘쳐나는 이 시대, 강론 대에 서기가 점점 부담스러워집니다.


그러나 놀라운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론을 듣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많은 신자들이 열심히 사제의 강론을 경청할 뿐만 아니라 간절한 마음으로 강론을 기다립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강론하기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강론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찬 사제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영적독서책을 언제나 손에 들고, 깊은 묵상과 성찰을 통해 늘 스스로를 돌아보고 채찍질하면서, 보다 정성껏 강론을 준비해야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리고 중요한 일 한 가지! 내가 선포한 강론에 걸맞는 삶을 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해야겠습니다.


여러 부류의 계층의 백성들 가운데 유달리 예수님의 눈밖에 난 사람들이 있었는데,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한없이 관대하고 인자하신 예수님이시지만, 유독 이 두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날카로운 독설을 수시로 날리셨습니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는데,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보여준 위선적인 삶, 왜곡된 신앙, 그리고 이중성이었습니다. 그들의 말과 행실은 너무나 동떨어져 있었습니다. 이론은 완벽한데 실제는 보잘것 없었습니다.


말 하나는 대단했습니다. 번지르르 하고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보란듯이 학위를 내걸었고, 교사로서의 권위를 내세웠습니다. 선택된 민족, 선택된 존재라는 자부심이 대단했습니다. 남에게 드러낼 수 있는 자선이나 기도, 단식, 고행은 철저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신심없는 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의 믿음은 실천없는 믿음이었습니다. 그들의 결심은 구체성이 없는 결심이었습니다. 그들의 이론은 결과없는 이론이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에는 자화자찬과 허세만 가득했습니다. 결국 그들의 신앙 행위에는 본질과 핵심이 사라져버리고 껍데기만 남었습니다. 그들의 가르침을 듣는 백성들의 마음 속은 적대감과 비웃음으로 가득했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은 가르침을 받는 사람보다 열배 백배 더 겸손해야합니다. 자신의 한계, 본질을 파악하기 위해 더 많이 성찰하고 연구해야 합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처럼 거짓 신심으로 나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고 또 돌아봐야합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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