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여름이 되면 수영할 일이 많았습니다. 여름 신앙학교, 복사단 캠프 등에서 꼭 수영해야 하는 계곡이나 수영장으로 갔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제가 전혀 수영을 못한다는 것이었지요. 수영할 줄 모르니 물에 빠져서 어떻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었고, 그래서 물 자체를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계곡이나 수영장에 가서 즐거울 수가 있었겠습니까? 더군다나 초등학생 때 잘 아는 선생님이 여름 휴가 때, 물에 빠져 돌아가시는 일을 겪고 나서는(그 장례미사 때 복사를 섰었습니다) 더 물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 두려움은 성인이 된 지금도 가지고 있을까요? 지금은 전혀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처럼 일부러 물 있는 곳을 피하고 도망가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성인이 되면서 수영을 배웠고, 지금은 남 못지않게 수영을 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물에 대한 두려움이 이제는 물에 대한 즐거움을 바뀌었습니다.
두려움 그 자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존재하는 것은 오직 두려운 생각과 이를 회피하려는 행동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두려움을 없애는 유일한 무기는 나의 행동뿐입니다.
두려움이 있다면 이를 위한 나의 행동이 무엇인지를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행동하지 않으면 두려움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 행동을 우리는 ‘용기’라고 부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죄인들과 함께 식사한다고 투덜거리는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죄인이 회개하여 새 삶을 얻는 것을 기뻐하라고 권합니다. 이를 위해 되찾은 아들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이 비유에 나오는 작은 아들의 모습을 보면, 아들의 자격이 당연히 없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복음만 봐도 충분합니다. 아버지가 생존해 계심에도 자기에게 돌아올 유산을 미리 챙겼다는 것, 방종한 생활을 하면서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것, 거기에 이스라엘 사람이면서도 부정한 동물로 여겨졌던 돼지를 치고 있었다는 것(부정한 삶을 살고 있다는 뜻) 등은 아들의 자격을 유지할 수 없음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말씀하고 싶은 것은 어떤 죄를 지었는가가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한 가지는, 이런 죄 중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작은아들이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를 굳게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이 결과는 해피엔딩이었습니다. 아들이 믿고 있었던 사랑과 자비로 아들은 용서를 받고 즐거운 잔치를 함께 누릴 수 있었습니다.
복음 끝에 나오는 큰아들의 억울함이 충분히 이해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아버지에 대한 아들의 믿음과 아버지의 아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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