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어른들이 길에서 다투는 모습을 종종 봤던 것 같습니다. 지금이야 워낙 투철한 신고 정신과 피할 수 없는 스마트폰에 의한 촬영으로 도저히 맨정신으로는 싸울 수 없는 환경이 되었지요. 하지만 예전에는 길에서 쉽게 볼 수 있는 광경이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꼭 “너 내가 누군지 알아?”라고 묻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는 것을 과시하려는 말입니다. 당연히 누구인지 모릅니다.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싸우는 것이 아닐까요?
알아보지 못하기에 화가 더 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자녀가 부모에게 “제가 누군지 알아요?”라고 묻는다면 어떨까요? 아마 기가 막힐 것입니다. 당연한 질문을 하니까 말이지요. 그러나 자녀는 부모에게 이런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부모가 나를 잘 알고 있다고 굳게 믿기 때문입니다. 즉, “내가 누군지 알아?”라는 것은 상대방이 나를 모른다고 생각했을 때 하는 질문입니다. 믿음 없는 상태, 그래서 싸움이 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께 자신에 대해 계속해서 말합니다. 지금 얼마나 힘든지, 너무 어려워서 당연히 도움을 줘야 하지 않냐고 말합니다. 마치 “제가 누군지 알아요?”라고 묻는 것만 같습니다. 바로 믿음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렇게 믿음이 없는 상태에서는 주님과의 관계가 호의적일 수가 없습니다.
무교절 첫날은 축제일 전날 저녁, 예수님과 제자들은 파스카 축제를 지냅니다. 축제 음식을 차릴 집도 없었지만, 예수님께서 기꺼이 고통을 당하려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 가운데 하나가 당신을 배반할 것이라고 예고하십니다. 그러나 처음에 예수님께서는 유다에게 회개할 시간을 주시려고 그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으시지요. 믿음 없는 유다의 모습을 보신 것입니다.
다른 제자들이 혼란스러워하자, 예수님께서는 그가 유다임을 밝히셨습니다. 사실 예수님을 넘긴 진짜 배반자는 악마일 것입니다. 그리고 유다는 예수님을 ‘주님’이 아니라 ‘스승님’이라고 부름으로써 믿음이 없었음을 보여주면서 스스로 단죄한 셈이 되었습니다.
바로 옆에서 예수님과 함께했던 제자 유다도 배반의 길에 들어설 수밖에 없었습니다. 믿지 못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제대로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떨까요? 과연 주님께 대한 굳은 믿음을 통해서, 주님과 친밀한 관계 그리고 언제나 함께 하는 관계를 만들고 있을까요?
내일부터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깊이 묵상하게 되는 성삼일을 보냅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을 키워나갈 수 있는 은혜로운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버려야 할 것.
누군가가 냄새나는 쓰레기를 줬습니다. 이 쓰레기를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그냥 소중히 간직하는 사람은 전혀 없습니다. 보관할 가치가 전혀 없다고 판단되면 곧바로 미련 없이 버릴 것입니다.
버리는 것이 당연합니다. 간직할수록 내게서 냄새가 진동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이 있습니다.
‘우리 삶 안에 과감하게 버려야 할 것은 무엇인가?’
버리지 못해서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이 참으로 많습니다. 사람들과의 갈등도 있고, 너무 많은 욕심과 이기심 역시 나를 힘들게 합니다. 미움과 분노를 하고 있을 때 아름다워 보이지 않습니다. 욕심과 이기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사랑의 향기가 나지 않습니다.
3월의 마지막인 오늘, 내가 버려야 할 것을 떠올리면서 곧 있을 예수님의 부활을 잘 맞이했으면 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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