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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4월 7일 _조명연 마태오 신부

작성자 : 홍보실 작성일 : 2021-04-07 조회수 : 3029

복음 루카 24,13-35


주간 첫날 바로 그날 예수님의 13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14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15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16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18 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20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21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22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23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24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26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27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28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29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30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31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32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33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34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35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아이가 목청껏 울고 있습니다. 얼굴까지 새빨개지면서까지 말입니다. 이때 주변의 이목을 강렬하게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아기 엄마는 서둘러 구석으로 가서 아기 기저귀를 갈아줍니다. 그 뒤에 이 아기는 어떠했을까요?

방긋방긋 웃으며 자신이 지금 기분 좋다는 것을 표현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아이가 왜 울었는지를 우리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아마 아이는 이런 표현을 한 것이 아닐까요?

“저 지금 굉장히 불편해요. 저 좀 도와주세요.”

그리고 불편함이 사라지자, “저 너무 기분 좋아요.”라면서 웃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자신의 불편함을 울음으로 외친 이 아기의 행동에 대해 어떻게 말할 수 있을까요? 우선 잘한 것일까요? 잘못된 것일까요? 자신의 무력함을 알리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것은 분명히 아닙니다. 오히려 잘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그래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는 이 아기처럼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불편함, 어려움을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어려움을 언제까지 고백해야 할까요? 당연히 해결될 때까지 해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이가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간절하게 기도로서 고백하지만, 자신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거나 해결되지 않았을 때 쉽게 주님의 반대편에 서서 불평불만으로 터뜨립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주님께서 도움을 주셔도 깨달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겸손한 사람의 자세는 끝까지 주님께 고백하는 모습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두 제자는 슬픔에 젖어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미리 당신의 죽음을 예고하셨지만, 십자가에 처형당하신 것에 실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절망과 의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자, 더는 주님 앞에 나아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이 옆에 계셔도 부활하신 그분을 알아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주님을 알아볼 수 있는 사람은 좋을 때나 나쁠 때나 할 것 없이 주님을 찾고 주님과 함께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결코 나의 청원이 들어줄 때만 알아볼 수 있는 분이 아니었습니다. 고통과 시련의 순간에서도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는 지혜와 주님께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겸손이 필요합니다. 끝까지 주님과 함께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먼저 제대로 보세요

여전히 코로나로 인해 자영업자들이 매우 힘들다고 하지만, 더 어려운 시간을 겪은 곳은 종교계가 아닐까 싶습니다. 특히 개신교 측에서 확진자가 많이 나와서 개신교 쪽에서도 스스로 “자기들의 모습이 부끄럽다”라고 말합니다. 일반 사람들에게 사람을 살려야 하는 종교가 사람을 죽이는 종교처럼 비쳤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보니 종교를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이들의 비판이 더욱 커졌습니다.

열심히 성당에 다니는 어머니에게 딸이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성당에 왜 나가요? 교회가 얼마나 부패했는데요?”

그러면서 어머니가 성당에 가지 않게 하려고 교회의 세속적인 모습, 상업적인 모습들을 계속 말하면서 열심히 비판했습니다. 한참을 듣던 어머니는 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 뭐 눈에는 X 밖에 안 뵌다더니, 넌 어째서 그런 것밖에 못 보니? 난 예수님 한 분만 보여서 다른 것은 전혀 보이지 않더라.”

교회의 실망스러운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실망스러운 모습이 교회 전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보지 않고서 교회 전부를 봤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비판을 하기 전에, 나는 예수님을 제대로 보고 있었는지를 먼저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조명연 마태오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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