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35 이르셨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36 그러나 내가 이미 말한 대로, 너희는 나를 보고도 나를 믿지 않는다. 37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38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39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40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자폐증의 대부로 유명한, ‘버나드 림랜드’라는 학자는 200여 명의 학생에게 잘 아는 사람 10명의 이름을 적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10명이 불행한 사람인지 행복한 사람인지를 적고, 그다음에는 그 사람이 남을 돕는 사람인지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사람인지 적게 했습니다.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행복해 보이는 사람의 4분의 3 정도가 남을 돕는 사람이었고, 불행해 보이는 사람 95%가 이기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이기적 삶이 아닌 이타적 삶이 행복으로 이끌어줍니다. 남을 본다는 것은 그만큼 내 안에 여유가 있는 것이기에 행복해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여유가 없으면 불안, 두려움, 걱정 등으로 겉으로 보이는 것도 불행하게만 보입니다. 철학자 데모스테네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다면 큰 행복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행복은 갖고 있지 않은 것을 원하지 않는 것이다.”
이 원칙을 지킬 수 있다면, 즉 갖고 있지 않을 것을 원하지 않는 마음을 가질 수만 있다면 우리 모두 큰 행복의 주인공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어차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큰 행복에 가깝습니다. 문제는 갖고 있지 않은 것을 가지려는 욕심과 남과 비교하는 이기심 때문이 아닐까요?
생명의 빵은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도록 우리에게 주신 주님의 사랑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는 조건이 충만하지만 우리는 더 가지려고 합니다. 가지고 있는 것은 계속해서 가져야 하고,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은 어떻게든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말이지요. 그러나 이미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며, 그 많은 것이 오히려 행복을 찾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라는 생명의 빵이 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세상의 빵은 다시 배고파지고 목마름이 계속 생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빵은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습니다. 이 세상 것이 아닌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단 한 명도 제외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를 바라십니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한데, 가지지 않아도 되는 세상 것에 대한 욕심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누가’ 내리는 평가인가?
고려시대 말기 유학자인 이달충의 책 ‘제정집’에는 우리가 생각할만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두 사람이 대화를 하다가 한 사람이 “누구는 그대를 가리켜 사람답다고 했고, 또 다른 누구는 그대를 가리켜 사람답지 못하다고 했습니다. 왜 그대는 누구에게는 사람대접을, 또 다른 누구에게는 사람대접을 못받는 겁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별 일 아니란 듯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나를 사람이라 하면 좋아할 만한 일이고, 사람답지 못한 사람이 나를 사람답지 않다고 해도 좋아할 만한 일이죠. 그러나 사람다운 사람이 나를 사람이 아니라 하면 그건 걱정할 만한 일이고, 사람답지 못한 사람이 나를 사람이라 한다면 그또한 걱정할 만한 일입니다. 기분 좋아하거나 기분 나빠하고 걱정하기 전에 평가하는 사람부터 살펴야 합니다.”
자신이 받은 평가 자체보다 ‘누가’ 내리는 평가인지가 중요합니다. 그래야 스스로를 온전하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인터넷에서의 평가에 흔들리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좋아요’라는 표시나 쓸데없는 악플에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그 평가를 내린 사람이 누구인지를 보면 됩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