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에 52 “저 사람이 어떻게 자기 살을 우리에게 먹으라고 줄 수 있단 말인가?” 하며, 유다인들 사이에 말다툼이 벌어졌다.
5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
54 그러나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나도 마지막 날에 그를 다시 살릴 것이다. 55 내 살은 참된 양식이고 내 피는 참된 음료다. 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사람은 내 안에 머무르고, 나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른다.
57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고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과 같이, 나를 먹는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 것이다. 58 이것이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다. 너희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것과는 달리, 이 빵을 먹는 사람은 영원히 살 것이다.”
59 이는 예수님께서 카파르나움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하신 말씀이다.
어떤 형제님이 교통사고로 다리에 큰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 형제님은 시간이 날 때마다 주님께 “일어나 걸을 수만 있게 해주십시오. 더 큰 것은 바라지도 않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백내장이라고 해서 수술을 한 어떤 자매님이 계십니다. 간단한 수술이라고 했는데, 글쎄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고 점점 시력을 잃는 것이었습니다. 이 자매님은 매일 기도했습니다. “볼 수만 있게 해주세요. 더 큰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
암 진단을 받고 2개월밖에 남지 않았다는 의사의 통보를 받았습니다. 이분 역시 “주님, 살게만 해주세요. 더 큰 것은 바라지 않습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많은 분이 이런 식으로 기도합니다. 이 이상은 필요하지 않다면서 말이지요. 그런데 누군가가 필요한 그 모든 것을 누리고 있는 우리였습니다. 누군가가 간절하게 바라는 기적을 아무렇지도 않게 사는 것입니다.
부자가 되어야 행복할까요? 높은 지위를 얻어야 만족할 수가 있을까요? 아닙니다. 지금의 삶에 감사하는 사람만이 행복하고 만족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주님의 살과 피도 이렇습니다. 진정한 행복이 무엇인지를…. 그래서 감사할 이유가 얼마나 많은지를 깨닫게 해줍니다.
혹시 이런 말을 쓰지 않습니까? 어떤 위험한 일을 겪으면 “휴~~ 죽을 뻔했네.”라고 말하고, 힘든 일을 겪으면 “아이고~~ 죽겠네.”라고 말을 합니다. 그만큼 죽음에 대해서 힘들어하는 우리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래서 많은 이가 죽음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으려 했습니다. 그 길을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십니다. 바로 당신의 살과 피였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은 주님께서 어떻게 자신의 살을 먹으라고 줄 수 있는지 의아해했습니다. 주님께 대한 믿음 없이는 도저히 인간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주님을 받아들인 사람은 이것이 얼마나 커다란 은총인지를 깨닫게 됩니다. 박해라는 고통 속에서도 주님만을 믿고 따를 수 있었으며, 주님의 살을 모시는 것이 커다란 기쁨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주님의 살을 모시면서 주님의 본성과 결합되게 되고, 이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 증거를 당신의 부활로 보여주셨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사람들은 믿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구원을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부활을 통해서 우리 역시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다는 분명한 희망을 품게 된 것입니다. 감사할 이유가 분명하지 않습니까?
부모님 덕분입니다.
지금 새벽에 일찍 일어나 기도하고, 많은 책을 읽고 또 많은 글을 쓰고 있는 저의 모습은 순전히 제 부모님 덕분입니다.
부모님은 한 번도 제게 “~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늦게 일어난다고 뭐라 하신 적도 없고, 공부 안 한다고 혼내지도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늘 새벽 3~4시에 홀로 일어나 기도하셨고, 아버지는 늘 서재에 앉아서 책을 읽고, 무엇인가를 계속 쓰셨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자라서인지 저 역시 새벽 일찍 일어나게 되었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생활을 자연스럽게 한 것 같습니다.
어머니 생전에 “왜 제게 열심히 하라고 강요하지 않으셨어요?”라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어머니께서는 “알아서 잘할 것으로 믿으니까….”라고 대답하셨습니다. 무조건 믿어주신 것이었습니다.
강요한 적은 없지만, 저를 믿고 부모님 스스로 보여주신 모습이 지금의 제 모습이 된 것입니다. 이제 저 역시 다른 이에게 좋은 모범을 보여야 하겠지요.
보이는 삶도 중요한 것 같습니다. 이 역시 남들이 보고 있으므로 늘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직접 모범을 보여주신 예수님도 이런 이유가 아닐까요?
(조명연 마태오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