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가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언어가 다른 지역으로의 여행은 언어의 장벽으로 힘듭니다. 간단한 대화야 어떻게든 할 수 있겠지만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눌 수가 없습니다. 한 번은 외국의 한 성지에서 혼자 있는데 한 외국인이 다가와서 한국인이냐고 묻습니다. 맞다고 하자, ‘나주 성모’에 관해 묻는 것입니다. 간단한 대화 이상은 불가능한 저에게 이단에 관한 대화는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 뒤 외국인과 대화하는 것에 늘 긴장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며칠 전에 읽은 책에서 이런 제 생각의 전환을 가져올 수 있는 내용을 보았습니다. 저자는 말이 통하지 않는 외국인과 대화 나누는 것이 너무나 즐겁다는 것입니다. 눈빛, 손짓 그리고 온몸으로 필요한 말만 주고받는 것이 즐겁다는 것이었지요. 무엇보다도 경청하려는 노력을 서로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같은 언어를 쓰는 사람에게서는 볼 수 없는 경청의 모습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생각해보니 그렇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으면 더 집중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 경청하려는 노력만으로도 아름답고 의미가 있습니다. 굳이 심각한 토론을 할 필요가 있을까요? 그저 필요한 말을 서로 들어주려고 노력하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만남을 만들 수 있었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에 대해서도 묵상하게 됩니다. 외국인의 말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온몸 전체로 집중하는 것처럼, 우리는 주님께 얼마나 집중하고 있었을까요? 이런 집중을 제대로 하지 못하니, 주님의 부르심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은 주님의 부르심에 대해 생각하는 성소주일입니다. 그 부르심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착한 목자이신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가장 적합한 모습과 가장 필요한 모습으로 우리를 부르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를 부르시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그분과의 시선을 맞춰야 합니다.
주님은 자신의 생명까지 내놓으시는 착한 목자이십니다. 그런데 착한 목자이신 주님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양들보다 자신의 안위에 더 큰 관심을 갖고 있는 삯꾼과 같은 세상의 목소리만 듣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세상이라는 삯꾼은 내가 잘못되는 것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자기만 잘 되면 그만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목소리를 들어야 하는 지가 분명해집니다. 바로 주님의 목소리를 듣고 따르는 착한 양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 역시 주님을 착한 목자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우리의 삶이 주님을 증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부르심을 제대로 따르는, 자신의 성소를 지키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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