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치라는 밴드의 노래를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분명히 판소리인데 판소리 같지 않으며, 너무 신나서 저절로 어깨가 들썩입니다. 그래서 어떤 밴드인지 인터넷을 살펴보니, 보컬 4명이 모두 국악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노래도 실제 판소리를 편곡해서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판소리를 고리타분하고 지루한 음악으로만 생각했습니다. 우리나라 고유의 음악이지만 사랑하기가 힘들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날치의 노래는 젊은 아이들도 좋아하고, 심지어 가사를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인도 좋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유의 음악을 이렇게 바꿔도 되는 것일까? 전통에 어긋나는 것이 아닐까?’
이런 의문을 이날치 구성원 중 한 명이 인터뷰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흥선대원군, 고종 때 했던 판소리와 정조 때의 판소리가 같을까요? 아니란 말이죠. 지금 제가 즐기는 게 21세기의 판소리라고 생각해요. 갓 쓰고 도포 입고서 하는 것도 21세기의 판소리고, 이날치가 이렇게 하는 것도 21세기의 판소리인 거죠.”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를 전통에 맞지 않는다고, 전통을 끊는 것이라 말할 수 없겠지요. 새로운 세상에 새롭게 맞춘 바로 ‘나’의 모습이 정답입니다.
예수님을 반대했던 종교지도자들을 떠올려 보십시오. 그들은 전통이라는 율법에서 벗어나지 못해서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주님의 모습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참포도나무이신 주님께 꽉 붙어 있는 모습입니다.
주님은 포도나무이고, 우리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라고 했습니다. 포도나무에서 떨어진 가지가 과연 많은 열매를 맺을 수 있겠습니까? 열매 맺기를 원한다면 그 포도나무에서 떨어져서는 안 됩니다. 만약 자신이 생각하는 모습과 다르다면서 포도나무에서 떨어져 나간다면 큰 손해를 입는 것은 가지인 자기 자신입니다.
우리는 주님께 꽉 붙어 있어야 합니다. 시대에 따라서 많은 것들이 변합니다. 주님께서는 이 변화에 맞춰서 우리에게 당신의 사랑을 주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과거에 매여 있으면서, 주님을 의심하고 주님과 함께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아브라함 시대에는 아브라함에게 딱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 이사악 시대에는 이사악에게 딱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 야곱 시대에는 야곱에게 딱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대에는 바로 ‘나’에게 딱 맞게 활동하시는 하느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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