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단계, 한 단계 더 높은 곳으로 나아가는 데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운(運)일까요? 아닙니다. 아마 모든 이가 ‘노력’이라고 말씀하실 것입니다. 적은 노력이 아닌 피나는 노력으로써만 한 단계 더 높은 것에 오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노력은 즐거울까요? 이 역시 아닙니다. 그 순간은 정말로 싫고 그 자리에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일 것입니다.
며칠 전, 동창 신부와 함께 차를 타고 어디를 가고 있었습니다. 창밖으로 수영장이 보였습니다. 이 수영장을 보면서 동창 신부가 이런 말을 합니다.
“너 저 수영장 기억나? 너랑 나랑 여기 수영장 다녔잖아.”
기억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랬나?” 하면서 의문을 표시했더니, 딱 한 번 이 수영장에 함께 갔었다고 말합니다. 이 수영장은 25m 길이가 아니라, 50m 풀이었습니다. 따라서 너무 힘들었습니다. 특히 강사는 늘 ‘한 바퀴 더’를 외치면서 소위 ‘빡세게’라고 할 정도로 힘들게 수영을 시켰습니다. 그래서 한 번 가고 안 갔다는 것입니다.
제대로 운동하려면 토할 것 같아야지, 기분 좋아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기분 좋은 것은 운동이 끝난 뒤의 몫이라는 것이지요.
우리의 고통과 시련도 다음 단계, 더 높은 단계로 가기 위한 준비가 아닐까요? 어렵고 힘들수록 그 뒤의 기쁨도 커질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늘 이 고통과 시련을 경험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오늘 성 필립보와 성 야고보 사도 축일을 맞이해서, 복음은 필립보와의 대화를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필립보는 예수님께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과 늘 함께했는데, 그런데도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예수님과 함께 하는 전교 여행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구세주이신 예수님과 함께 하는 것이 늘 기쁨으로 가득 찰 것 같았지만, 밥도 제대로 먹을 시간도 부족했고 잠잘 시간도 없었습니다. 여기에 계속해서 사람들을 만나는 고난의 시간이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 아버지를 직접 본다는 것은 편안하고 기쁨이 넘치는 순간이 될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자기 안에 계시다는 것을 말씀해주십니다. 즉, 지금의 상황이 하느님 아버지를 본다고 해서 특별히 바뀌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지금의 자리에서 하느님 체험을 하는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기쁨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지금의 자리가 하느님 아버지를 뵙고 느낄 수 있는 자리입니다. 특히 고통과 시련을 겪으면서 성장을 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하느님 아버지 체험을 더 뜨겁게 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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