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6주일
좁은 울타리를 뛰어넘는 부활 신앙
[말씀]
■ 제1독서(사도 10,25-26.34-35.44-48)
유다인들에게 로마제국 군대의 군인은 국가와 민족의 안전을 위협하는 적대자로 인식될 수밖에 없었기에, 이러한 인물이 이스라엘 공동체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초대 교회 신자들 역시 동일한 관점을 벗어나지 못했으나, 천주 성령의 인도로 이와 같은 편협한 종교적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었다. 이로써 예루살렘 교회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진정 범세계적임을 깨달음과 아울러 이를 실천에 옮겨 보편적 교회상을 일구어 나간다.
■ 제2독서(1요한 4,7-10)
제2독서에서 우리는 성 요한의 사상을 집약하고 있는 본문을 만난다. 몇 줄 안 되는 구절을 통해 성 요한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하느님에 대하여 말해 왔던 내용들 가운데 참으로 새로운 것을 요약하여 정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드러난 이 새로운 가르침은 기존의 인간관계를 뒤집는 전혀 새로운 원칙으로 제시된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어 당신의 아드님을 우리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보내주시기까지” 보여 주신 헌신적 사랑이 인간관계의 기본적 틀이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 복음(요한 15,9-17)
복음적 사랑, 그것은 주고받음에서 상호 대등한 관계에 있는 인간들이 갖는 감정의 차원이 아니라, 마음을 온통 열어 아낌없이 주는 차원의 사랑을 말한다. 이 사랑은 그리스도께서 당신이 자유로이 택하신 사람들을 위해 당신 목숨을 바치셨다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그 의미와 실천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제자들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셨으니 이제는 제자들이 바칠 차례이다. 세상 사람 모두 그리스도의 구원 선물을 나누어 가질 수 있도록 이제는 제자들이, 바로 우리가 스승의 모습을 그대로 따라야 할 때다.
[새김]
■ 이웃과의 관계 속에서 때로 우리는 좁디좁은 울타리 쌓기에 얼마나 골몰하고 있는가? 살고 있는 차이, 알고 있는 차이, 가지고 있는 차이, 더 나아가 인종과 언어와 문화 차이 등 각 가지 정도의 차이를 내세움으로 우리의 개인적 또는 집단적 배타성과 폐쇄성은 높아만 간다. 신성(神聖)을 마다하시고 인성(人性)을 취하셨을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사람들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으신 주님, 무덤이라는 좁은 울타리를 뛰어넘어 부활하신 주님을 믿어 고백하는 부활 신앙 앞에서 이러한 벽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 우리의 부활 신앙은 스스로 쌓아 자신을 가둬놓고만 좁은 벽을 허물고 뛰어넘는 구체적 신앙 행위로 드러나야 한다. 특히 분단의 고통 속에 있는 이 민족의 통일에 대한 이해타산적 계산이 그렇고, 정상적 몸짓이 어렵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장애인들을 멀리하거나 거부하려는 의도와 자세가 그렇다. 개인적 또는 집단적 배타성을 벗어버릴 수 있을 때 바로 우리는 무덤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본받는 사람들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이다.
교우 여러분, 부활 신앙은 좁은 울타리를 뛰어넘을 때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신고사유를 간단히 작성해 주세요.